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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대첩은 섬진강에서 시작됐다


큰사진보기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구례읍사무소의 왕버들나무. 둘레가 4m에 이른다. 버들의 왕답게 멋스럽다. 운치도 있다.
▲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구례읍사무소의 왕버들나무. 둘레가 4m에 이른다. 버들의 왕답게 멋스럽다. 운치도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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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구례는 1597년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이 오래 머문 곳이다. 의금부에서 풀려나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은 그해 4월 26일 구례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구례현감 이원춘, 손인필 등과 함께 순천왜성으로 갔다가 5월 14일 다시 구례현청으로 왔다. 

구례에서 이순신은 체찰사 이원익과 이원춘, 정사준, 정사립, 손인필, 손응남, 장세호 등과 함께 정세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5월 27일 석주관을 떠날 때까지 이순신은 구례에 머문 동안 나라의 앞날에 대해 고뇌했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되고 구례현을 찾은 건 8월 3일(양력 9월 13일)이다. 조선수군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선 병력과 병기, 군량, 전선의 확보가 중요했다. 그 답을 전라도에서 찾기 위해서였다. 이순신은 평소 전투력을 유지하고 작전을 지원하는 병참을 전라도에서 확보할 수 있다고 봤다.

이순신이 도착했을 때 구례현청의 성 안팎은 텅 비어 있었다. 일본군이 다시 몰려온다는 소문을 들은 백성들이 미리 산속으로 숨어든 뒤였다. 몇 해 전 일본군들에게 참혹하게 당한 기억이 생생한 백성들이었다.

이순신은 현청에 머물고 있는 장수와 흩어진 구례백성들에게 조선수군 재건을 호소했다. 당시 일본군은 밀양과 김해, 진해, 거제를 유린하고 전라도로 향하고 있었다. 이순신은 밀려드는 일본군의 북상을 막으면서 조선수군을 재건해야 하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서 있었다. 하지만 이순신의 옆에는 고작 송대립, 황대중 등 군관 9명과 병사 6명이 전부였다.

구례현청 자리에 들어선 구례읍사무소 전경. 일제강점기에 읍사무소가 들어선 이후 근현대 구례 행정의 중심지였다. 등록문화재 지정돼 있다.
▲  구례현청 자리에 들어선 구례읍사무소 전경. 일제강점기에 읍사무소가 들어선 이후 근현대 구례 행정의 중심지였다. 등록문화재 지정돼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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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진보기정유재란 승전공원의 조형물.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 재건을 형상화하고 있다.
▲  정유재란 승전공원의 조형물. 정유재란 때 이순신 장군의 조선수군 재건을 형상화하고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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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조선수군 재건의 필요성을 역설한 구례현청은 당시 돌로 쌓은 읍성이 둘러싸고 있었다. 둘레 4481척(1350m), 높이 13척(4m) 가량 되는 성이었다. 성안에는 객관, 봉서루, 봉서헌 등과 우물이 9개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청의 위치는 현재 구례읍사무소가 있는 자리다. 시가지로 개발되면서 읍성의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 일제강점기 1936년에 읍사무소가 들어섰다. 이후 근현대 구례 행정의 중심지가 됐다. 건물은 붉은색 벽돌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등록문화재 제120호로 지정돼 있다.

구례읍사무소 앞의 왕버들나무와 명협정. 500번째 봄을 맞이한 왕버들나무지만, 나뭇가지는 싱그러운 잎새를 무수히 매달고 있다.
▲  구례읍사무소 앞의 왕버들나무와 명협정. 500번째 봄을 맞이한 왕버들나무지만, 나뭇가지는 싱그러운 잎새를 무수히 매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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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왕버들나무의 위용. 나무의 둥치가 굵고 깊게 파여 있어 한눈에 봐도 세월을 짐작할 수 있다.
▲  세월의 더께가 묻어나는 왕버들나무의 위용. 나무의 둥치가 굵고 깊게 파여 있어 한눈에 봐도 세월을 짐작할 수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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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관아 터였음을 증거하는 500년 된 왕버들나무와 600년 된 참느릅나무 두 그루가 남아있다. 왕버들나무의 키는 20m, 둘레 4m에 이른다. 보통의 나무와 달리 가지가 크게 벌어져 있다. 줄기는 비스듬히 자라고 있다.

버들의 왕답게 일반적인 버들의 가냘프고 연약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운치가 있고 멋스럽다. 나무의 둥치도 굵고 깊게 파였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더께가 켜켜이 묻어난다. 봄햇살을 받은 나뭇가지는 싱그러운 잎새를 무수히 매달고 있다.

빨리 자라고, 오래 사는 참느릅나무는 키가 18m와 14m, 둘레 3m와 2.5m에 이른다. 나무의 껍질이 작은 비늘처럼 떨어져 얼룩덜룩해 보인다. 잎의 가장자리가 둔한 톱니 모양을 하고 있다. 끝은 뾰족하다. 흙이 거의 없는 땅에서도 잘 자랄 만큼 생명력도 강하다. 지금도 녹색 잎이 무성하다.

구례읍사무소 뒷편을 듬직하게 지키고 선 참느릅나무 두 그루. 참느릅나무는 흙이 거의 없는 땅에서도 잘 자랄 만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  구례읍사무소 뒷편을 듬직하게 지키고 선 참느릅나무 두 그루. 참느릅나무는 흙이 거의 없는 땅에서도 잘 자랄 만큼 강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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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읍사무소 앞에 복원된 명협정. 명협정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자주 머물면서 체찰사 이원익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생각을 나눴던 공간이다.
▲  구례읍사무소 앞에 복원된 명협정. 명협정은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자주 머물면서 체찰사 이원익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생각을 나눴던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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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버들나무와 참느릅나무는 당시 백의종군을 하고,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을 묵묵히 지켜보며 응원했다. 이순신도 이 나무를 바라보며 큰 힘을 얻었다. 오랜 세월이 지났는데도 나무의 자태가 의연하다. 더운 여름날, 읍사무소 직원과 마을주민들에게 시원한 그늘을 내어줬다. 마을과 읍사무소의 풍광도 아름답게 해주고 있다.

왕버들나무 옆에 복원된 명협정은 당시 구례현청에 있던 모정을 토대로 했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자주 머물면서 체찰사 이원익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며 생각을 나눴던 공간이다. 지금은 인근 주민들이 쉼터로, 어린이들은 놀이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구례 정유재란 승전공원에 있는 손인필 비각. 손인필은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순절했다.
▲  구례 정유재란 승전공원에 있는 손인필 비각. 손인필은 이순신과 함께 노량해전에서 순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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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읍에 조성된 정유재란 승전공원. 열두 척의 배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  구례읍에 조성된 정유재란 승전공원. 열두 척의 배를 상징하는 조형물이 눈길을 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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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현청에서 이순신은 군자감 군관 손인필과 그의 아들 손응남을 만났다. 손인필은 식량을, 손응남은 간식으로 조생종 감을 가져왔다. 이순신은 오늘날 구례특산품으로 자리잡은 달짝지근한 감을 맛보며 전쟁에서의 달콤한 승리를 떠올렸다. 결기를 잡아 줄 원기도 되찾았다.

군자감에 소속된 손인필은 군수품 조달과 군인을 모집하는 일을 맡고 있었다. 구례 출신으로 현지 사정에도 밝았다.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을 밤재까지 달려와 맞아 준 이도 그였다. 이순신은 어려울 때 따뜻하고 진실하게 맞아준 손인필을 유난히 아끼고 사랑했다.

손인필 부자는 이순신과 함께 이듬해 노량해전에서 순절했다. 조정에서도 이들의 충절을 기려 표창했다. 구례읍사무소에서 구례공설운동장으로 가는 길목에 손인필의 비각이 있다. 1963년 후손들이 세웠다. 이 비각을 중심으로 정유재란 승전공원이 만들어졌다.

이순신은 손인필 부자와 구례현감 이원춘 등과 함께 일본군을 물리칠 작전회의를 하며 밤을 지새웠다. 회의에서는 내륙 깊숙이 자리한 옛 관아를 찾아 물자를 보충하고 일본군의 추격을 피해 빠르게 이동하는 전략을 짰다.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면서 병참을 확보하는 일은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매 순간이 긴박할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은 새벽녘이 다 돼서야 잠자리를 찾아갔다. 잠자리는 성의 북문 밖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쉬이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머릿속에서는 앞으로 재건할 수군과 병참 확보에 대한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백성들을 모아서 전장으로 함께 가겠다는 손인필 부자의 위로를 받고서야 간신히 잠에 들었다.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뒤 구례에서 보낸 첫날밤이었다.

큰사진보기보성군청 앞에 진열돼 있는 열선루의 주춧돌.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을 재건하던 이순신은 이곳 열선루에서 조정의 수군 철폐령을 받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다’는 장계를 써서 올렸다.
▲  보성군청 앞에 진열돼 있는 열선루의 주춧돌.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을 재건하던 이순신은 이곳 열선루에서 조정의 수군 철폐령을 받고,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다’는 장계를 써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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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사진보기장흥 회령진성 역사공원.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이곳 회령포(회진)에서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머물고 있던 조선함대 12척을 회수했다.
▲  장흥 회령진성 역사공원. 정유재란 당시 이순신 장군은 이곳 회령포(회진)에서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머물고 있던 조선함대 12척을 회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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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에서 첫걸음을 뗀 이순신의 조선수군 재건은 곡성, 순천, 보성, 장흥으로 이어졌다. 순천에서 다양한 무기를, 보성에선 많은 군량미를 손에 넣었다. 수군을 철폐하고 육군에 합류하라는, 조정의 수군 철폐령에 맞서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있다(今臣戰船 尙有十二)'는 장계를 쓴 곳이 보성 열선루였다. 장흥 회령포(회진)에선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머물고 있던 조선함대 12척을 회수했다.

회령포에서 출정식을 마친 조선수군은 해남 이진·어란을 거쳐 벽파진으로 향했다. 이순신은 명량대첩을 하루 앞두고 수군진영을 우수영으로 옮겼다. 울돌목에서 13대 133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대승을 이끌었다. 세계 해전사에 길이 빛나는 명량대첩이다.

명량대첩의 현장 울돌목에 세워진 '고뇌하는 이순신' 동상.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을 재건하며 울돌목까지 온 장군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  명량대첩의 현장 울돌목에 세워진 '고뇌하는 이순신' 동상.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을 재건하며 울돌목까지 온 장군의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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