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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나는 최초 한인 이민역사를 보시겠습니가...

역사저널 그날new

윗줄에 클릭 하시고 즐감하시길.

다들 힘드시다고요. 피눈물 나는 한인 최초의 산 이민역사를 보시겠습니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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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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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lorenjo 작성자 2019.02.03. 18:12

한인 최초의 이민은 대한제국 1902년도에 멋모르고

이민에 끌려와 하와이 멕시코등에서 노예보다 더한 동물학대

취급정도의 화씨 100도 이상의 열악한 상태에서 새벽 4시에

기상해서 하루 왼종일 뒷전에 말탄 감독의 째찍을 맞으며 죽움의

하루 하루로 목숨을 연장하였다.

댓글
2등 이민초기 2019.02.04. 17:26

특집-①한인 이민의 역사

[시카고 중앙일보] 기사입력 2003/11/05 13:13

1900년대 하와이에 거주했던 일본 이민자들의 기념 사진. 이들은 오늘날 하와이에 집단 거주하는 일본 이민자들의 기원이다.

1900년대 하와이에 거주했던 일본 이민자들의 기념 사진. 이들은 오늘날 하와이에 집단 거주하는 일본 이민자들의 기원이다.

하와이 사탕수수밭 근처에 위치한 조선인 노동자의 집단거주시설 전경. 

하와이 사탕수수밭 근처에 위치한 조선인 노동자의 집단거주시설 전경. 

호놀룰루에 위치한 조선인교회에서의 한인학생 단체 기념사진.

호놀룰루에 위치한 조선인교회에서의 한인학생 단체 기념사진.

미국 공항에 도착한 한국 입양아들의 미국 입국 장면

미국 공항에 도착한 한국 입양아들의 미국 입국 장면

1882년 조선-미국 상호무역협정(Korean-American Treaty)이 체결된 후 조선인과 미국인은 자유로운 상호방문, 경제활동이 허용됐다.
상호무역협정이란 미명하에 체결됐지만 이것은 미국이 조선에 상권을 개척하려는 의지로 체결된 일방적인 협정이었다.
이듬해 민영익의 주도로 조선의 개화를 추구하는 신진세력들이 최초로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중 일행인 유길준은 귀국을 포기하고 매사추세츠주에 소재한 사설 사관학교(The Dammer Academy)에 등록해 한국인 최초의 유학생으로 기록됐다.
유길준은 이후 서유견문이라는 저서를 통해 서양제국을 비교적 소상히 소개함으로써 당시 지식층에 개화의 중요성을 인식시키는 데 한 몫을 했다.

한국인 최초의 이민자 집단은 1885-1888년, 당시 유학생, 외교관, 상인, 그리고 갑신정변의 실패로 망명을 추구하는 정치인으로 구성됐는데 이들이 최초로 미국땅을 밟았다.
당시의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50여명의 조선인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때 당시 갑신정변에 실패한 서재필(구한말 독립운동가이자 독립신문 창시자)도 포함돼 있었다.
서재필은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 이란 이름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1892년 조지 워싱턴 대학(George Washington) 에서 세균학을 전공한 한인 제1호 서양 의학박사로 알려져 있다.

1902년 12월 22일, 102명의 조선인으로 구성된 제2차 이민자 집단은 미국 상선 갤릭호(S. S. Gaelic)를 타고 인천 제물포항을 출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주 오아후섬에 도착했다.
1차 이민집단과 비교할 때 정확한 수치(남 55, 여 22, 자녀 25)가 오늘날까지 남아있다.
당시 하와이에는 많은 일본 노동자들이 이미 거주하고 있었는데, 일본 노동자들은 사탕수수 농장의 열악한 노동환경에 불만, 백인 농장주들에게 임금인상을 요구했다.
위협을 느낀 백인 농장주들은 일본인을 대신할 값싼 대체집단을 찾았고, 그 결과 조선인들이 선택됐다.

주로 20대, 30대로 이뤄진 집단으로 대부분 조선에서의 하층민들과 농민들이 3년 단기 계약으로 하와이로 옮겨왔다.
최근 미국코리아 타운에서 벌어지고 있는 한인 이민사 100주년 기념행사는 2차 이민집단의 미국 하와이섬 도착일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1885년에 도착한 1차 이민자 집단을 한인 이민의 시초라고 하면 근대 한인이민 역사는 약 120년이 된다.

최근 한국 KBS 방송국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최초로 미국에 입국한 한국인은 1850년대에 미국 유타주 탄광에 광부로 일한 조선인으로 밝혀졌다.
당시 여러명의 일본인들로 추정되는 광부들이 탄광의 갱구가 무너져 죽었다는 기록의 문서와 그들의 비석으로 추정되는 무덤들도 발견됐다.
비석에 일본인 동료가 새긴 것으로 추정되는 한국식 한자 이름과 당시 광부 인명록에 기록된 자료로 볼때 조선인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입국 시기와 방법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조선인보다 미국 이주가 빨랐던 중국인들 또는 일본인들과 함께 입국했다는것이 유력한 추측일 뿐이다.

1903년 시작된 집단이주는 1905년까지 계속 이뤄졌다.
하지만 일본제국은 조선인들의 해외 항일운동 거점 확보를 저지하기 위해, 또 하와이에 거주하는 값싼 조선인 이민자 노동력으로부터 일본 이민자의 노동경쟁력을 보호하기 위해 1905년 더이상 조선인의 하와이 이주를 허가하지 않았다.
결국 2차 이주는 1903년 이후 1905년까지 대부분 이뤄졌고 당시 7,226명의 조선인이 하와이에 거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하와이에 거주했던 조선인들은 미국문화에 동화되기보다는, 오아후섬 외곽에 위치한 와이아루아 사탕수수농장(Waialua Plantation) 과 코로아 사탕수수 농장(Koloa Plantation)에서 한인집단체제를 유지하며 살았다.
이주집단은 한국식 풍습을 그대로 유지했으며, 한복을 입고 해마다 고종황제의 생일잔치, 설날, 추석 등을 지냈다고 알려진다.

당시의 이주집단은 남초 현상으로 많은 남자들이 독신으로 살았다.
이후 1908년 조선으로부터 가족과 신부를 데려올 수 있게 허용하는 협정(Gentleman's Agreement)이 미국과 일본사이에 체결됐다.
이에 따라 일명 ‘사진신부’(Picture Brides) 약 8백명이 1910년부터 1924년까지 하와이로 이주했다.
사진신부란 하와이에 거주하는 독신 남자들이 자신의 사진을 조선으로 보낸 후 조선에 있는 관련단체들이 젊은 신부를 찾고 예비 신부들을 하와이로 시집보낸 것을 말한다.
사진신부에 관한 에피소드는 많다.
하와이에 거주하는 조선 남성들이 결혼에 대한 집념으로 나이와 외형을 속여 보낸 엉터리 사진은 당시 서방 열강의 하나인 미국에 대한 동경에 빠져 있던 많은 젊은 여인들에게 관심을 끌었다.
하와이에 도착한 예비 신부들은 조선에서 본 사진과 다른 신랑의 얼굴을 보고 배에서 내리기를 거부하다가 결국 어쩔 수 없이 결혼하는 일이 비일비재였다고 전해진다.

초창기 이민자들의 이주 목적은 영구적 이주보다는, 당시 조선에서의 어려운 경제적 고난을 해결하고자 잠시 미국에 체류하는 것이었다.
1903년 이들은 김이제 (Kim E-je)의 주도로 하와이 오아후섬 Mokuleia에 한인교회를 설립했는데, 이는 현재 미국 전역에 퍼져 있는 한인교회의 시초라고 볼 수 있다.
기록상 대부분의 이주자들은 농장의 중노동과 낮은 임금(월 15달러) 때문에 백인 농장주와 3년계약 만료후 재계약을 거부했다.

당시 거주자인 약 7천명 중 약 2천명은 3년계약 만료와 함께 조선으로 되돌아갔다.
나머지 5천여명의 조선인들은, 국내의 불안정한 정치·경제 문제, 비싼 선박운임 등으로 미국에 남았다.
5천여명의 귀국을 포기한 조선인 중 약 1천명은 미국 본토 특히 캘리포니아주, 오레곤주, 그리고 워싱턴주로 이주한 것으로 기록이 남아있다.
당시에는 비자, 영주권, 시민권이란 개념이 확실하지 않았기에 미국에 자유로이 체류할 수 있었다.

이때 도산 안창호는 하와이로부터 미국 본토로 이주한 한국인들을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 규합해 최초의 한인복지기관인 우정연합(Friendship Association)을 설립했고, 초대 회장으로 선출됐다.
현재 한국 이민자들의 주요 거주지는 LA, 뉴욕, 시카고 등이지만, 1900년대 초반 조선인의 미국 진출 교두보는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가 중심이었다.
후일 한국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한 이승만도 하와이와 샌프란시스코에서 생활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특히 이승만은 당시 아시아인으로서 드물게 명문 조지워싱턴대 학사졸업, 하버드대 석사졸업을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중립국가론’으로 한인 최초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러한 배경은 그의 정치적 카리스마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승만은 1960년 4.19 혁명으로 권좌에서 물러나 미국의 하와이로 망명, 1965년 하와이에서 생을 마감했다.

1900년대 초반 하와이에서 사탕수수농장의 3년계약 만료 후 미국에 남은 5천명 중 미국 본토로 이주한 1천여명은 대부분 분산됐다.
이들은 외형상 비슷한 중국인과 일본인 등에 융화돼 거의 소멸됐다.
또 영어에 익숙한 이민자들이 없었기에 대부분 일용 노동직이나, 당시 미 본토의 워싱턴주 시애틀과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를 연결하는 대륙횡단철도 공사와 유타주의 탄광에 투입됐다.

하와이 외곽에 위치한 사탕수수 농장에 집단 거주하며 남아있던 4천여명의 조선인들도 계약만료 후 하와이의 호놀룰루나 인근 섬으로 분산됐다.
이들은 코리안 타운을 형성하지 못하고 다른 차이나 타운이나 리틀 도쿄에 흡수됐다.
그들은 이전과는 달리 점차적으로 한국 고유 전통과 관습을 버리고 미국문화에 동화(Acculturation)돼 버렸다.
따라서 오늘날 하와이에는 한국 이민사에 관한 유적지가 거의 없는 상황이다.
이후 1924년 아시아인들의 미국 이민을 불허하는 이민법(Immigration Act)이 미 의회에서 통과되면서, 더이상 아시아인들의 합법 이주는 불가능하게 됐다.
따라서 하와이의 한인 이민사는 한국인의 최초 집단이민으로서 의의가 있다.
결국 1900∼1950년 사이에는 미국 전역에 1만여명을 넘지 않는 한국인들이 살았다고 전해진다.

한인의 제2차 집단이주는 이후 1950년대 한국전쟁 이후 이뤄졌다.
2차 집단이주 구성원들은 종전후 미국병사와 결혼한 한국여성과 전쟁고아들이었다.
약 5만명으로 추산되는 한국 여자들이 한국전에 참전한 미국 병사와 결혼해 미국으로 입국한 것으로 기록됐다.
당시 아시아 국가로부터의 미국 이민을 제한하는 미 이민법(1924-1965)에 의해 매년 극소수만 미국에 이민을 할 수 있었는데 5만명의 수치는 당시에는 굉장한 인원이었다.

한인의 제3차 집단이주는 사실 1965년 이민을 규제하는 법이 삭제되고, 아시아 국가로부터의 이민을 허락하는 이민조항의 의회통과 후 일어났다.
새로운 이민조항은 매해 아시아 각 국가들로부터 2만명 한도(National Origins Quota) 내에서 미국으로의 이민을 허용했다.
따라서 1965년 이후 매년 한국으로부터 1만5천명 정도의 한국인의 이민이 이뤄졌다는 기록이다.
당시 이민자 구성원들에게는 원화보다 훨씬 높은 달러 가치, 선진국에 대한 동경(American Fever), 1970, 1980년대 남북한의 전쟁 재발 가능성,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 때문에 미국이란 나라는 한국인들에게 평화스럽고 매력적인 나라였다.
특히 한국의 의사, 약사, 간호사, 의료 기술자, 과학자와 기타 고급인력 약 1민3천명이 1977년까지 들어왔다.
현재 코리아 타운에 형성돼 있는 한인 의사들은 당시에 온 사람이 많다.
그리고 1970년대 중반까지 이주집단들은 LA, 뉴욕, 시카고를 중심으로 영세한 규모의 한인 사업체들을 운영했다.
언어문제와 외형상의 차이로 백인문화에 흡수되지 못했지만, 이들의 집단거주는 1980년대 코리아 타운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문성준=본사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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