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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민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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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민낯 드러내기>(Exposing The Real Che Guevara)
체 게바라 신화의 사기성에 대해서는 일찍이 알고 있었지만 이처럼 실증적이면서도 체계적으로 서술한 책은 본 적이 없었다. 폰토바에 의하면 체 게바라는 “냉혈적 살인자”이자 “사디스트 고문자”였으며 “권력에 굶주린 물질주의자”였다. 아니 무엇보다 체 게바라에게 치명적인 이야기는 “무능한 게릴라였으며 겁쟁이 기회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서구 게바라 숭배자들이 쿠바 방문시 반드시 들르는 명소. 이곳은 게바라가 조직한 쿠바 비밀경찰 건물이다.의사 면허도 없었던 게바라체 게바라는 의사로 알려져 있다. “의사로서 부유하고 안정된 삶을 누릴 수 있었는데 이를 포기하고 가난하고 억압받는 민중을 위해 총을 잡고 싸우다 산화한 인도주의적 영웅”이란 것이 서구와 한국사회에 퍼져 있는 게바라 신화의 요체이다.
그런데 게바라는 의사 면허를 받은 적이 없다. 게바라가 졸업했다는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 의대 졸업생 명단에는 게바라가 없다. 심지어 게바라 자신도 자신이 의사였다는 사실을 부인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의학 공부를 한 적이 있고 따라서 의학지식이 있기는 하지만 의사 면허를 가진 적은 없다는 것이 볼리비아에서 체포됐을 당시 게바라 자신의 증언이다.
게바라는 레닌이나 스탈린 혹은 카스트로와 같은 냉혹한 혁명가가 아니라 리얼리스트이면서도 휴머니즘적 품성을 잃지 않은 낭만주의자로 묘사되고 있다. 이러한 묘사는 주로 게바라 사망 이후 쿠바공산당 선전국에서 발행한 ‘게바라 일기’를 근거로 한 것이다. 이러한 선전물에는 1959년 쿠바혁명 직후에 게바라가 쿠바의 반혁명 처벌기관인 ‘라 카바나’(La Cabana)의 책임자였다는 사실을 서술하지 않거나 간략히 언급만 하고 넘어간다.
‘라 카바나’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직후의 ‘체카’(소련 KGB의 전신) 혹은 히틀러의 ‘SS나치친위대’와 유사한 조직으로 반정부 인사들을 강제투옥, 재판 없이 처형하고, 강제수용소로 보냈던 곳이다. 1970년까지 ‘라 카바나’에서 처형된 쿠바인의 숫자만 하더라도 1만4천명에 달한다. 쿠바 인구가 640만이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어마어마한 숫자라 할 수 있다.이러한 사실에 대해 일부에서는 “혁명을 위해서는 일부(?!) 악질 반동분자의 처형이 불가피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하기야 남민전 혁명가 김남주 시인은 남한혁명이 완수되면 300만 명쯤은 처단해야 된다고 말했다고 하니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마 안 되는 숫자일지도 모르겠다.게바라는 ‘라 카바나’의 도살자단순히 숫자만이 문제가 아니다.
게바라는 처형을 즐기는 자였음이 여러 증언을 통해 확인되고 있다. 심지어 한 어머니가 반혁명죄로 체포된 10대 아들을 구명하기 위해 게바라를 찾아가자 그 자리에서 전화를 걸어 그 소년의 즉결처분을 명령하는 ‘사디스트적 행위’를 보이기도 했다.게바라의 즉결처분은 게릴라 운동 당시에도 만연했다. 쿠바에서는 현재 우리나라 기준으로 볼 때 빈농에 해당될 수준의 농민들을 악질 대지주라면서 즉결처분했으며 이러한 행위를 “농민들에게 공포심을 주지 않으면 게릴라는 생존할 수 없다”는 속류 마키아벨리 논리로 정당화하곤 했다. 볼리비아에서는 조우한 농민 일가족을 '정부군에게 게릴라의 위치를 알릴지 모른다'는 이유만으로 몰살하기도 했다.
이러한 게바라가 휴머니스트라면 히틀러나 스탈린도 휴머니스트가 아닐 이유가 전혀 없다.흔히 게바라는 청년 저항운동의 상징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록 음악 가수들과 히피그룹이 게바라에게 열광하기도 한다. 심지어 동성연애운동가들이 게바라를 성인(聖人)시 하는 경우도 볼 수 있다. 그러나 게바라야말로 록 음악과 히피, 그리고 동성연애자의 적이었다.
게바라는 록 음악과 히피 등을 “미제국주의의 썩은 문화”로 간주, 이에 대한 “말살”을 지시하고 실행에 옮긴 자이다. 달리 말해, 반문화(counter culture) 운동이 게바라를 추앙한다는 것은 유대인이나 집시가 히틀러를 추앙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는 행위이다.게바라의 친손자인 카네크 산체스 게바라도 쿠바를 버리고 멕시코로 망명했는데 이는 카네크가 록 음악가였기 때문이다. 1974년생인 카네크는 현재 카스트로만 비난하고 있는데 록 음악을 정작 탄압한 장본인은 자신의 할아버지 게바라였다.
초호화판 생활 즐겨또 다른 신화는 게바라가 민중적이고 검소했다는 것이다. 게바라는 쿠바혁명이 성공하자마자 요트 선착장과 폭포가 딸린 거대 수영장, 사우나와 마사지 룸이 있으며 욕실만 7개인 거대 저택을 자신의 거주지로 삼아 초호화판 생활을 누린 사람이다. 게릴라전을 할 때도 롤렉스시계를 고집하던 인물이다.게바라를 우상시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치명적 이야기는 “게릴라전의 천재”로 알려진 것과는 정반대로 “형편없이 무능한 게릴라”였다는 사실이다.
게바라 게릴라전의 신화가 만들어진 전투는 쿠바정부군의 군용열차를 습격한 ‘산타클라라’(Santa Clara) 전투이다. 게바라를 찬양하는 서적들은 이 전투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엄청난 격전이 벌어진 것처럼 묘사되곤 한다. 그런데 막상 이 전투에서 몇 명을 사살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이 없다.이 전투에서의 사망자는 민간인 2명과 게바라 측 게릴라 2명 혹은 3명 등 모두 최고 5명에 불과하며 정부군 전사자는 단 1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는 전투라기보다는 군용열차 매수사건이다.
전투의지가 없는 정부군은 카스트로에게 돈 35만 달러(50만 달러라는 설도 있음)을 받고 군용열차를 내준 것이다.그리고 이 군용열차를 불 지르고 사진을 찍어 서방언론에 대대적으로 보도한 것이 ‘산타클라라’ 전투이다. 사상자가 나온 것은 게바라 게릴라들의 약탈에 분노하고 있던 농민들과 충돌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전투 이외에 게바라가 지휘해서 쿠바 정부군과 싸워 제대로 이긴 전투는 단 한 건도 없다.이러한 사실은 아프리카 콩고 내전에서도 잘 드러난다. 게바라는 매복에 걸려 계속 패전했으며 콩고 공산주의자들의 무능을 탓할 뿐 직접 교전에 나서는 것을 꺼렸다.
이런 무능은 자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볼리비아 게릴라전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게바라는 볼리비아로 가기 전에 현지 언어를 알아야 게릴라전을 할 수 있다며 안데스 인디언들이 주로 사용하는 쿠에추아어(語)을 익히라고 대원들에게 지시했다.그러나 그가 게릴라전 지역의 원주민어는 쿠아라니어(語)였다. 볼리비아에서 게바라는 단 한 명의 볼리비아 농민도 게릴라로 획득하지 못했다. 그의 활동은 볼리비아 산 속에서 정부군을 피해 도망 다니면서 신고 위험을 핑계로 조우한 볼리비아 농민들을 학살하는 것뿐이었다.게바라 신화의 마지막 장면은 게바라가 용감하게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끝난다. 적탄에 의해 게바라의 카빈 소총이 고장 나고 권총 탄알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포로로 잡혔다가 처형됐다는 것이다.그러나 진상은 다르다. 그의 카빈 소총은 멀쩡했으며 권총 탄창에도 총알이 가득했다. 게바라를 포위(?)한 볼리비아 병력은 불과 2명이었다. 그러나 게바라는 손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쏘지 마라. 내가 체(Che)다. 내가 죽는 것보다 살아 있는 편이 당신들에게 유리할 것이다”라고 외쳤다.
게바라는 소련 공산주의와는 직접적 관련이 없었던 인물인양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게바라는 이미 1956년 멕시코시티에서 소련 KGB 요원 니콜라이 레오노프와 접촉한 적이 있다. 또 게바라는 여성 편력이 심한 인물이었다. 물론 이 점을 매력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다. 앞서 언급한 한 30대 여성은 “게바라 같은 인물이면 단 하룻밤이라도 영광”이라고 말하기도 했다.문제는 게바라의 애인으로서 볼리비아 산속에서 함께 게릴라전을 전개하다가 사살당한 일명 ‘타냐’로 불린 독일 여성이다. 그녀는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 소속으로서 게바라와 처음 만난 것은 게바라가 독일을 방문했을 때였다.통역관의 자격으로 만난 타냐는 게바라와 같은 침대에서 지냈으며 이 모든 장면은 슈타지에 의해 촬영됐다. 이 정보는 소련 KGB와 공유됐으며 그 후 분케는 KGB와 게바라를 연결시키는 연락원 노릇을 하게 된다.리버럴 좌익들이 만든 신화그럼 어떻게 게바라 신화는 만들어지게 됐는가?
게바라는 미국 리버럴 좌익의 언론 플레이 작품이다. 게바라의 게릴라전은 군사적 입장에서 별 볼일 없는 것이었다. 아니 카스트로 게릴라전 전체가 그러했다. 엄청나게 처절한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연상하기 쉬운데 2년간의 게릴라전으로 인한 전사자는 양측 모두 합쳐 182명에 불과하다.
카스트로와 게바라를 영웅으로 만든 첫 번째 인물은 당시 뉴욕타임스 기자 허버트 매튜스(Herbert Mattews)였다.매튜스는 1957년 최고 50명 정도의 카스트로 게릴라군이 위치한 쿠바의 시에라마에스트라를 방문, 카스트로와 게바라를 직접 만나 취재하게 되다. 매튜스는 카스트로를 ‘쿠바의 로빈 후드’로 묘사, 대대적으로 보도했으며 한 달 뒤 CBS 촬영팀이 들어와 이를 영상에 담았다.
이들에 의해 과장된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곧 미국 좌익 리버럴의 영웅이 됐다.그리고 이러한 미국 언론 보도는 쿠바 국내로 역수입돼 카스트로를 쿠바 반정부 운동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쿠바혁명은 카스트로의 농촌 게릴라전에 의한 것이 아니라 도시 봉기 형태로 이뤄졌다. 단지 정부 붕괴 후 정권 및 무력 진공상태를 보일 때 카스트로 게릴라군이 명성을 바탕으로 수도 아바나에 입성, 권력을 장악해 버린 것이다. 당시 쿠바의 농촌 인구 비율은 35%로 쿠바는 이미 상당히 도시화된 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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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1등 게바라 친구 2020.08.31. 19:59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하지만 불가능한 꿈을 가슴 속에 간직하자." 고 왜치든

위선자 혁명가는 불가능한 꿈이 현실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마침내 깨달았을 때, 불리비아의

산지로 무모한 진격을 하여 결국 39세의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물론  살아생전 언제나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믿었든 그는 무모한

전투에 불가능이 무었인지 조차 깨닸지 못하고 처참히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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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 체 게바라 2020.09.01. 07:52

'책에바라' 야 니가 체 게바라를 알기나 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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