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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섬유 산업사 - 02] 내가 제일 잘나가 '나일론 양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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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_05_07.gif해방이후 사업체 일제조사를 살펴보면 한국섬유공업의 24.2%인 1백49개 업체가 경북에 입지해 있고 그 중 95개 업체가 대구에 집중돼 있다고 나와있다. 대구공업에서 섬유공업이 차지했던 비율은 33%로 역내공업을 대표, 해방후 재건 초기부터 섬유도시화가 형성됐음을 알 수 있는데 이처럼 대구섬유공업이 공업재건 초기부터 그 기반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타공업보다 기능 및 기술인력 확보가 용이했던 배경 때문이다.

인근지역의 풍부한 천연섬유자원과 유휴 노동력을 최대한 활용, 입지를 다져나

간 대구섬유는 6.25를 거치면서 정치적, 사회적 격동기를 맞이해 수많은 기업을 생성, 소멸시키기도했다. 전국의 대형 면방업체들과 제사업체들이 정부의 적극적인 후원으로 기업을 육성시킨데 반해 규모가 작고 자금이 영세한 대구 직물업계는 별다른 정부의 지원을 받지 못했다. 이에 대구섬유인들은 집요한 노력으로 섬유산업육성을 위해 각종 제도를 마련했는데 특히 직물류세 철폐, 포플린 수입금지 조치의 실행은 후일 한국섬유산업 발전에 큰 활력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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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_05_08.gif최종소비자에게 판매가격의 10%를 부담시킨 직물류세가 처음 제정된 것은 1938년. 일제가 전쟁준비를 위해 시행한 것으로 해방이후에도 세무공무원들이 공장이나 상점마다 직물세를 받기위해 진을 침에따라 상행위가 크게 위축됐다. 
서문시장 포목상들은 세무공무원이 나타났다 하면 셔터문를 내리고 철시하는 소동을 벌이는등 섬유기업인들 뿐 아니라 판매상들까지 직물세 철폐를 요구하고 나섰으나 직물연합회 측에선 수수방관으로 일관했다. 결국 1954년 당시 경북직물조합 이사장이던 최익성씨가 서울에서 대 정부 및 국회 로비활동을 벌여 공식적인 직물세 철폐를 요구하고 나섰는데 직물세 존속을 요구하던 면방업계의
저항에 부딪쳐 곤혹을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대구 섬유인들의 노력 끝에 처음의 열세가 점차 만회되기 시작했고 분과위원회를 거치면서 「소비세는 최종 소비자가 부담해야 하니 직물세는 존속돼야 한다.」고 주장하는 측과 「원사메이커에서 원천 징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기에 이르렀다.

1954년 3월 26일 분과위원회에서 본회의로 넘어감에 따라 찬반 투표결에 붙여지게 됐는데 결과는 재석의원 1백80명 중 1백11명이 직물세 폐지에 찬성하여 대구 섬유인들의 압도적 승리로 끝났다. 3월26일. 이 날을 기념하는 전국의 직물업자들은 직물의 날로 제정하고 직물노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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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물세 폐지에 이어 포플린 수입문제를 두고 파동이 일어났다. 
무역상들과 상공부 상역국은 국산 포플린 질이 형편없다는 이유로 소비자를 보호해야 한다며 질 좋은 일제 포플린 수입을 주장했다. 다시 직물업자들의 반발이 일어나고 수입 찬성 측과 반대 측의 공방이 치열해지자 고심하던 상공부장관이 공청회를 열었다.

공청회가 시작되자 상역국장은 일제 포플린 중 고급품과 국산 포플린 중 저급품을 들고 나와 비교하며 소비자 보호를 이유로 일제의 수입을 주장했고 뒤이어 나온 최익성씨는 사회를 보던 상공부 장관에게 무례함이 있더라도 이해하라고 앙해를 구한 후 "귀한 달러로 포플린을 수입하기 전에 상역국장부터 수입해야 한다."고 일격을 가하고 "왜 두살밖에 안된 직물업계를 크기도 전에 죽이려고 하느냐" 며 1년간 수입 금지 조치를 해주면 질 좋은 포플린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렇게 해서 포플린뿐 아니라 모든 직물류가 외제의 홍수에 휘말림없이 착실한 성장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그 후 1960년대 들어서도 대구 섬유인들은 특정 외래법 수입 금지 조치를 위해 투쟁을 벌여 언제부터인가 중앙관리들 사이에서 '대구에서 간담회하면 골치 아프다.'는 말이 오가게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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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와중에서도 대구 화섬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인 1950년대 중반 나일론, 아세테이트 등 화섬직물에 손을 댄 업체가 상당수 생겨났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산업이 파괴돼 원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던 대구 섬유업자들은 일본과 미국에서 인견사, 스프 등의 원료를 수입해 모스린을 제직했고 간간이 나일론, 아세테이트사도 수입해 화섬직물을 생산했다. 당시에는 물건이 있는대로 팔려나가던 시기여서 원료의 수입이 곧 기업의 성장과 직결돼 원료수입을 위해 선달러 구하는 문제가 관건이었다.

정부가 원조로 들여온 달러를 입찰을 통해 민간에 불하했는데 대구 섬유업자들도 달러 낙찰을 보기 위해 대거 상경했다. 인견,아세테이트,나일론 등을 낙찰된 달러로 주문하면 물건이 도착하기전 두세배로 오를 때여서 달러낙찰은 곧 떼돈을 버는 길이었고 이때 큰돈을 번 대구 섬유업자들도 많다. 
대구지방에는 이때 화섬시대가 서서히 열리고 있었는데 염색가공시설이 전무해 경북직물조합이 경북염공이라는 염색공장설립에 나섰다.

염색기계는 부산 부두까지 들여왔으나 통관할 관세 및 공장건설 자금이 부족했다. 궁리 끝에 달러를 배정받아 업체에 배정하고 수수료를 받아 해결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상공부가 반대했다. 
이에 재무장관과 직접 절충, 60만달러를 따냈다. 
계약금만 내고 달러로 원료를 수입한후 1년뒤에 갚기로 했으니 이때 만금과 버금가는 달러를 배정받은 대구 직물업자들은 한밑천 톡톡히 잡은 셈. 
이 달러 배정사건을 두고 수사기관에서는 배정에 의혹여부를 수사했으나 유야무야되고 이후 「5월 불론사건」으로 기록에 남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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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_05_09.gif1957년 4월 12일 삼경물산 경영주 이원방씨가 동구 신천동에 자본금 2억원을 들여 한국 나일론 공장을 설립, 1958년 10월 12일 나일론.스트레치공장을 완공했다. 알본에서 섬유무역으로 돈을 벌던 이씨가 한국에 나일론 공장을 설립할 결심에 귀국했을 당시의 심경이 「나의정경 50년」이라는 회고록에 '한국에 합섬공장을 첫 설립할 생각에 온몸이 떨리는 것 같다.'고 밝혀져 있다.

스트레치 가공법은 나일론사를 가공해 촉감을 부드럽게 하는 것인데 한국나일론에서 나온 스트레치 나일론사가 양말공장으로 공급되면서 본격적인 나일론양말

시대가 열렸고 당시 전국 메리야스공업 생산의 10%에 머물던 실적은 30%로 증가, 나일론 양말의 붐을 일으켰다. 1963년 이씨가 스트레치 공장 뒷편에 나일론 필라메트인 화섬사 시설을 착공, 1964년 1월1일부터 2.5톤의 나일론 원사를 생산함으로써 비로소 대구 화섬시대는 개막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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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

1등 유리할머니 2016.06.10. 15:41

내가 대전 중학교 다닐때 반에 양주장집 아들이 나이롱 양말을 신고 항시

뽐내든 생각이나고 백화점의 쇼윈도우에 나이롱 양말이 부러뭄의 대상이였다.

하기야 그 당시 면 양말을 신었는데 어찌나 구멍이 잘도 나든지 어머님께 민망하기

까지도 했으나 어머님은 구멍난 양말에 전기다마를 집어넣고 깜쪽같이 짝집기 하듯

잘도 수선해 주셨고  얼마지나 나이롱이 흔해지자 명절에나 선물로 얻어 신었었다.

그후 나이롱 선풍이 부러 너두 나두 나이롱 양말을 신기 시작했다. 지금은 탄력 있고

위생적(衛生的)인 면양말로 다시 돌아 왔지만, 당시의 ‘나이롱 양말’은 내구성(耐久性)만

좋았을 뿐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 무좀이 생기곤 했었다. 정말 호랑이 담배 피든 시절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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