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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칼럼] 3포, 5포, 7포세대

by 투데이닷컴 posted Dec 03,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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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상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3포세대라는 신조어가 유행했다. 3포세대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5포세대(3포에다 취업, 주택구입), 7포세대(5포에다 인간관계, 희망)라는 말이 나왔다. 


꿈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젊은 세대가 점점 자신들의 꿈을 접고 포기하는 것이 더 많아졌다”.  세상의 담이 너무 높아져서 올라가기도 전에 포기한다. 재정부담으로 인하여 자신의 삶을 포기하기보다 자신의 ‘취미’를 즐기며 삶의 질을 높여나가려고 노력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들이 모든 것을 다 즐기고 난 후에 채워지지 않는 욕망과 욕구를 누가 책임지겠는가? 그것은 바로 ‘교회의 몫’이라 생각한다. 교회여! 일어나라.


세상은 한번도 예수를 싫어하거나 미워하지 않았다 싫어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오히려 세상은 예수를 위대한 선생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예수를 쫓는 무리들, 즉 자칭 ‘제자’라고 불리는 교회의 구성원들과 교회들로 인하여 예수의 명성이 실추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 속에서 예수의 가르침과 그의 순전한 모습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적어도 예수를 닮고자 몸부림치며 세상에서 살아낸 예수의 제자들은 세상을 바꾸어놓았고 그들의 모습을 보며 세상은 인정했다. 그들의 착한 행실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보이는 세상 속에서 억울한 인생들은 보이지 않는 세상을 바라보며 위로와 소망을 갖게 되었다. 또한 갇힌 자는 자유를, 억울한 자는 놓임을 받게 되었다. 


이에 반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217). 성경은 아직도 세상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는 책이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교회의 구성원들로 인해 세상은 혼란스럽기만 하다. 이민초기에는 교회가 모든 정보의 매개체역할을 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찾아 고향의 향수를 달래고 정보를 함께 나누며 격려하며 지냈다. 


교회를 통하여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도 적지 않았고 지금도 교회마다 중직자로 잘 섬기고 있다. 이에 반해 이민교회는 참으로 수난이 많았었다. 세월이 지나 초신자보다는 수평이동으로 교인수를 불려나가는 상황에서 ‘부흥’이라고 외치는 교회들은 스스로의 체중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 교회의 지상명령이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는 것을 잊고 있는 것 같다. 교회에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이다. ‘성례’라 함은 ‘성찬과 세례’이다. 


마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라고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종교개혁이전처럼 사람들이 무지하지도 않고 교권아래에 맹종하지도 않는다. 성경을 읽고 해석할 수 있는 특정한 계층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세상은 우리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하루하루 변하고 있다 이에 반해 교회는 개혁되지 않고 있다. 이제 세상은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말로만 외치는 교회보다는 함께 울고 웃으면서 삶 속에 깊이 들어오는 친숙한 교회를 원한다. 


현재 비난받고 세상의 우려를 자아내는 교회들이 기독교를 대변하지는 않는다. 참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로 올바로 서기 위해 소수가 모여 몸부림치는 교회들도 많다. 눈에 보이지 않을 뿐이다. 크고 작은 것, 많고 적은 것, 가진 것와 없는 것의 가치기준이 아닌 충성되고 착한 것에 최선을 다하는 신실한 자들도 있다. 그러한 사람들이 인정받는 교회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기독교의 본질은 세상을 뒤집어엎는 것이었고 복된 소식을 전하는 것이었다. 기독교는 하나님 외에 그 어떠한 것도 개혁해야 하는 운동이다. 개혁교회는 매일매일 개혁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스스로 규범과 의식과 금기사항을 만들고 스스로 갇혀버렸다. 세상과 소통을 하지 않고 벽과 장벽을 높이 쌓다보니 스스로 고립되었다. 이단척결로 자신의 성결을 지키려고 하니 ‘사랑’을 잃어버렸다. 지킬 수 없는 수많은 장로의 유전들과 법들은 오히려 율법보다 더 지키기 힘들어졌다. 


지키지 못하면 스스로 죄악시하는 자괴감에 빠진다. 또한 자신들만의 우상화 작업을 감행한다 오직 ‘나’라는 사람에게만 집중하여주기를 바라는 이기적이고도 반윤리적인 행동을 스스럼없이 강행한다. 


교회의 구성원들이 예수로만 올 수 있는 수많은 길들을 막고 서 있다. 오히려 더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고 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십자가’와 다른 이론을 펼치고 있다. 십자가는 최악의 형이다 그러나 자신이 누리는 영광을 십자가로 둔갑시켜 버렸고, 모든 이들이 ‘영광’이라고 말하는 수많은 혜택을 자신이 홀로 견디어나가야만 하는 십자가로 변색시켰다.


이제 교회는 세상의 비판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근본과 본질’을 붙잡고 각성해야 할 것이다. 오직 말씀, 믿음, 은혜,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위하여 ‘자신을 매일 쳐서 말씀에 복종하는 삶’을 살아야겠다.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한봉헌 - 좋은 친구들 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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