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적해병, 장애인 탁구왕 된 사연

2008.11.10 21:25

장다비 조회 수:6771 추천:106



패럴림픽 탁구계의 미다스의 손이 있다.
88년 서울 패럴림픽서부터 2008년 베이징 패럴림픽에 이르기까지 13개의 메달을 목에 건 탁구왕 이해곤씨(척수장애1급·안양·55)가 바로 그 주인공.

올림픽에 참여할 때마다 개인전 혹은 단체전에서 반드시 금메달을 따냈던 이해곤씨. 남들은 한 개도 따기 쉽지 않은 게 금메달이건만 그가 딴 올림픽 금메달은 무려 7개에 달한다.

사실 이번 패럴림픽 예선전에서부터 힘줄에 문제가 생겨 경기조차 치르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행여나 부상 사실이 소문나면 상대선수가 얄궂은 경기를 펼칠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진통제 2알에 의지해 끊어진 힘줄로 인한 고통을 참아내며 개인·단체서 모두 동메달을 따냈다.

"사람들은 1등만 기억하고 3등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없지만 올림픽 3·4위전은 지면 노메달이 되기 때문에 결승보다 더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경기가 펼쳐져요. 그래서 금메달보다 더 값진 게 동메달이라고들 말하기도 해요. 그래도 1등이 제일 잘한 건데 왜 3등한 저를 찾아오셨어요?"라며 멋쩍은 웃음을 짓는 이해곤씨의 '인생 3막 이야기'를 한 번 들어보자.

2막1장, 키 180 건장한 청년이 패럴림픽 탁구왕 된 사연
밝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하는 그에겐 남모를 아픔이 있었다.
그는 30년전 해병대 복무 중 야간 특수훈련을 하다 낭떠러지에서 목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국군 통합병원에 1년 입원 후 보훈병원으로 병상을 옮겨 10여년을 병실의 하얀 벽을 바라보며 지내왔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의 잔디에서 하늘을 바라보며 햇볕을 쬐고 있는데 미국인 선교사 모우숙씨가 그에게 말을 건네며 손을 잡아주었다.

"그 당시 매일같이 보온 도시락에 직접 만든 따뜻한 밥을 담아 오셔서 어린아이에게 먹이듯 떠먹여주셨어요. 김을 싸서 주시기도 하고 밥 위에 깍두기를 얹어 주기도 하셨어요. 제게 유일한 말동무였고 오랜 병원생활에 많이 지쳐있던 때 일어설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워 주셨어요."

그렇게 두 사람은 양어머니와 양아들의 인연을 맺게 되었고 어느 날 일본 출장길에서 돌아와 그를 찾은 양어머니는 탁구라켓을 붕대로 감아 이해곤씨 손에 쥐어줬다.

1980년, 이해곤씨는 그렇게 탁구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하면 된다는 의지로 잃어버린 것들로 인한 아픔을 극복하고 흘린 눈물만큼 단단해져 탁구를 시작한지 6년만인 85년 런던국제대회에서 금메달 두 개를 목에 걸 수 있었다. 그 후로 20여년의 긴 세월, 그는 장애인 탁구왕의 지존 자리를 지켜왔다.

2막2장,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은그가 사고 후 제일 불편한 것은 역시 몸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경추를 다쳐 하반신을 전혀 움직일 수 없고 손도 자유자재로 쓸 수 없어 탁구 라켓도 붕대로 단단히 고정시켜야 칠 수 있다. 또 탁구는 손목의 스냅을 이용하는 경기인데 그의 몸은 그마저도 허락하지 않아 탁구를 칠 때 어깨를 돌려가며 쳐야 한다.

매 순간 힘들게 공을 받아내야 하지만 탁구를 감사한 마음으로 칠 줄 아는 사람, 그는 사고 후 소소한 것에도 고마워 할 줄 아는 마음을 배웠다.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몸 다음으로 불편한 건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이었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흔치 않았고 길가다가 눈이라도 마주치면 눈살을 찌푸리기 일쑤였다.

"88올림픽 이후 국민의 의식수준이 높아져 장애인이라고 이상하게만 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요즘은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워 외출을 피하지는 않아요. 세월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가서 무덤덤해진 것도 있겠지만 확실히 달라졌어요. 몸이 불편해 나와 조금 다를 뿐이라고 생각해 주시는 거 같아요."

한국에서 불편한 몸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은 일이라고 그는 말한다.
장애인을 위한 시설들을 형식적으로만 갖춘 곳이 많아 계단에 설치된 휠체어 전용 리프트나 엘리베이터도 작동하지 않는 곳이 많고 휠체어로는 쉽게 오르내릴 수 없는 턱이 생활의 장애물이다.

"장애인 화장실의 경우, 남녀가 구분되어지지 않고 공용으로 사용해야만 하는 경우도 많아요. 더 기막힌 건 남자화장실 입구 옆에 붙어있는 거죠. 남자야 덜 하겠지만 여자분의 경우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성별에 따라 구분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도 사회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요."

열에 일곱 군데는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지만 급하니까 싸야지 어쩌겠냐고 말하는 그의 입가에 씁쓸한 기운이 감돈다. 화장실 가득 청소도구가 있을 때는 할말을 잃는다고.

연말에 남는 예산 쓴다고 멀쩡한 도로 뒤엎지 말고 작은 거라도 같은 사회를 살아가는 약자를 한 번 더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조심스럽게 꺼낸다.

3막 무대 뒤, "빨리 통일이 되면 좋겠어요"
"내 생전에 통일이 되면 좋겠어요. 무엇보다 군대가서 나같이 알게 모르게 다치는 사람들이 없도록 병역제가 없어져 젊은 사람이 군대 안가도록 말이에요. 남북이 갈라져서 같은 민족끼리 총부리 겨누고… 이게 뭐에요. "

이토록 의연하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을 눈물 속에서 보냈을까. 국가와 민족을 위해 희생의 대가로 돌아온 설움을 그 누가 알아줬을까. 돈만 있으면 군대도 가지 않을 수 있는 불공평한 사회는 그에게 아픔만 남겨줬다.

그는 자신과 동료들의 희생의 댓가가 되어 돌아온 아픔은 그 누구에게도 반복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그리고 아픔을 가진 사람들이 어두운 음지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 더 많은 사람들과 살을 부딪혀가며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를 바란다.

"운동이 어렵고 힘드니 젊은 사람들이 많이 기피하고 있어 젊은 선수들이 많이 없어요. 직접 도움을 줄 재원을 마련해 젊은 선수들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는 세계를 제패할만한 기술이 있어도 배울 사람이 없다며 조그만 한숨을 내쉰다.
젊은 시절 1인자로 20여년을 보내와 이젠 더 이상 바랄 게 없다고 말하는 그에게 더 이상의 욕심은 없어 보였다.

장애인은 일반 탁구 선수와 다르기 때문에 같은 눈높이를 맞춘 가르침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기에 근성있고 탁구에 대한 열의를 가진 후배가 가르침을 청한다면 열심히 가르쳐보고 싶은 바람은 있다.

겨울은 그에게 움직임이 버거워 더 춥다고 한다. 그러나 수십 년 장애를 이겨온 그에게 겨울 삭풍이야 무슨 대수랴. 그의 인생 3막에 희망이란 따뜻한 봄꽃이 이미 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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