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 이어>
그런 반복되는 사랑과 이별 속에 맞는 20대 중, 후반.
이제는 내 미래와 인생에 대해 생각한다.
약 3년, 타협의 시기다.
사자처럼 싸워왔던 시간들의 보상을 받고 싶어 하는 시기다.
결혼 상대로서 내 연인의 값어치를 재 보는 시간이다.
성격도 맞아야겠고 성의 격도 맞아야겠고 내가 돈을 열심히 벌면 잘 관리도 해줄까 하는 어렴풋이 계산을 튕기는 시간이다. 이 3년 가량을 많은 사람은 가장 중요하다고 믿고 있다.
죽을 때 까지 두발 뻗고 살 수 있으려면 이 시기의 선택이 가장 최상이 길 다들 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택할 근거가 명확 지 못하다. 평가 받을 여유조차 없이 집이나 회사에서 떠밀리듯 시간이 흐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시기는 성에 관해서 만큼은 박사라고 믿는 시기다. 그 어떤 누구도 내 앞에 나타나면 있는 대로 해치울 수 있는 상어 같은 자신감이 충분한 시기다.
그러나 평소 사귀던 그녀와 실제로 살려고 하니까 끔찍하다.
그러면서도 비교적 짧디 짧은 시간에 동반자를 정한다.
때론 7년 넘게 사귀어서 결혼했다지만 그래도 따져보면 쉼과 뜨거움이 공존한다. 밀고 당기는 서로의 평가의 시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혼에 이르는 상대에 대한 평가의 시간은 대략 1년이다.
실제로 만난 시간은 긴듯해도 준비 땅 해서 결혼 까지 이르는 시간은 365일을 채 넘기기도 힘든 게 우리네 결혼 인생이다. 왜 그런 걸까?
체념이 있고 포기가 있어야 하며 인내가 있어야 하는 게 어쩌면 우리네 결혼이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철학가 니체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니체처럼 사는 듯이 보인다.
사자처럼 싸우는 시기가 있고 그 싸움의 대가로 낙타처럼 인내해야 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토끼처럼 연약하게 기존 사회에 어쩔 수 없이 적응 해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때의 사람을 두고 능구렁이라고 징그럽게 표현하기도 한다. 알 거 다 안다는 얘기다.
그러다 보니 포기도 체념도 있다는 것이다. 세상 모든 일들이 다 만족스럽게 될 순 없다. 집안이 조금 힘든 듯 하면 회사가 받쳐주고 친구가 소외시키면 부인이 받쳐줘야 한다.
마찬가지로 육체적성이 부족하면 정신적성이 채워줘야 한다. 때론 좋지 않아도 그 이를 위해 신음소리를 내줘야 한다. 하지만 너무 긴 시간은, 너무 긴 포기와 체념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질리니까. 그런 의미에서 100% 성공 보다는 50% 성공에 내 마음을 배팅하고 사는 것이 편하다.
그리하여 이 절반의 성공에 사랑을 50% 보탤 필요가 있다. 그리고 믿게 하자. 아니 그렇게 믿어 버리자. 그게 편하다.
7,5,3,1... 다 비슷한 우리다. 때론 만나자 마자 결혼 하기도 하고 생면 부지의 사람과 신혼 첫날밤에 처음 섹스 할 때도 있다. 하지만 서서히 커가자. 서서히 결혼하자.
내 인생은 내가 주인인 만큼 뜸들이는 시기도 가져보자. 그리고 절반만이 성공해도 내 인생이 실패가 아님을 깨우치는 여유를 갖자.
절반의 성공 그것은 곧 여유의 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