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난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법칙이 아니라 철칙이다.
브라질 한인교포사회가 형성 된 지도 어언 60년이 되어간다. 반세기가 훌쩍 넘었으니 초반에 가족을 이끌고 오신 가장들은 돌아가신 이가 많고 남은 분들도 속속 돌아 가시고 있다.
교포가 많을 때는 4만명이 넘었다고 했으나 지금은 2만명에서 3만명 정도라 하는데 체감하는 교포 수는 그 보다 더 적은 것 같기도 하다. 더군다나 코로나의 팬데믹 현상은 온 세상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곳 한인사회에서도 전염병으로 인한 죽음의 그림자가 각 개인의 삶에 현실적으로 펼쳐지면서 죽음에 대한 공포증이 배가 되고 들려오는 흉흉한 소식에 차라리 무디어져 있는 즈음에, 바로 하루 전 식당에 마주 앉아 대화했던 사람 홍중의씨가 심장마비로 유명을 달리하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홍중의 씨는 70년대 파라과이를 거쳐 브라질로 이민 들어와 80년대 초부터 한인들의 밀집지역인 봉헤찌로에 정착하여 사는 동안 한결같이 아침 일찍 나와 돈 보스꼬 성당 옆 후아 아마조나스 에스키나(Rua Amazonas esquina) Bar에 앉아있으면서 찌라덴치 전철 역에서 나오는 한국교포들의 길 안내 잡이는 물론 본인이 자리잡은 그날의 그곳이 교포들의 쉼터가 되고 ‘카더라’ 뉴스청취모임장소가 되기도 하여 외팔이 홍’이라고 불리우며 사람들에게 쉼과 정을 나누던 따뜻한 사람이었다.
그의 장점 중에 하나라면 긴 세월 동안 수 많은 대인관계를 하면서 허탄(虛誕)한 소리를 하지 않았기에 많은 사람들이 신뢰하고 그의 곁으로 많이 모여 들었다. 그를 중심으로 모여드는 사람들을 편안하게 대화의 장이나 식사 자리를 부담없이 만들어지곤 했었다.
그런 그가 떠나고 없는 자리에 칭송이 자자하다. 한결같이 긴 세월을 흠 없이 모임장소를 이끌어 온 것은 말은 쉬우나 쉽지않다.
홍중의씨의 평상의 소신과 모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교포사회에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그가 떠난 자리엔 벌써 사람들의 그림자가 뛰엄뛰엄하다. 교포들 모두 하나같이 만나면 아쉬워 한다.
세월의 흐름은 예나 지금이나 앞만 보고 달려갈 뿐이라 시간이 지나면 잊어진 사람이 될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인간의 한 평생이 너무도 허무하다.
이웃 간 화기애애한 덕담도 오갈 때도 있지만 대개는 남의 험담이나 ‘카드라’방송만 늘어놓는 장소나 시간이 되지않게 홍중의씨가 살아 생전 부드러운 모임의 장소가 됐던 것처럼 됐으면 좋겠다. 그는 만인을 포용하는 능력이 특출해 그를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특히 생각 나는 게 있다면 ‘내가 이발하러 가야 할텐데’ 하면 ‘머리카락이 몇 개가 있다고 이발하러가’ 하던 소리가 금방 들리는 듯 하다. <정하원 - 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