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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문점이란 이름이 생기기 까지의 많고도 많은 비사(秘史)...


판문점은 언제 만들어졌을까요? 6·25 전쟁을 중단하기 위한 최초의 예비회담은 1951년 7월 8일 개성 북쪽에 위치한 고려동에서 열렸습니다. 이후 휴전회담이 같은 곳에 위치한 내봉장에서 20여 회 개최됐습니다. 하지만 그 주변에서 북한군의 무력 시위가 잇따르자 UN군 측이 회담 장소를 옮기자고 제안했습니다.


1953년 휴전협정이 된 판문점은 원래 우리말로 널문리 였습니다. 공식 명칭은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이며, '판문점(板門店)'은 이 지역의 이름입니다. 남한의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파주시(舊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어룡리', 북한 행정구역상으로는 '개성직할시 판문군 판문점리'이나, 남ㆍ북한의 행정관할권에 속하지는 않는 특수한 지역입니다.


판문점이란 이름의 유래는 휴전 회담 장소가 이곳으로 옮겨지면서, 이 회담에 참석하는 중공군 대표들이 이곳을 쉽게 찾아보게 하기 위해 당시 회담장소 부근에 있던 주막을 겸한 가게(店)를 한자로 적어 "板門店"으로 표기한 것이 그 유래라고 합니다. 원래 널빤지로 만든 문이 있다고 해서 널문리로 불리던 곳이며, 판문`은 우리말인 `널문`을 뜻에 맞춰 한자로 표기한 것입니다.


널문리는 서울에 다녀가던 중국사신이 이 마을에서 술 한잔을 얻어먹은 것이 이곳을 주막 거리로 만들었고, 이후 서울과 개성을 오가던 길손들이 잠시 숨을 돌리던 곳으로 정착됐습니다.

 

또한 1592년 임진왜란 시 왜구의 침략을 피해 평양으로 피난을 가던 선조 임금 일행이 머물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에 북측은 새로운 회담 장소로 '널문리 주막마을'을 선정했습니다. UN군과 북한군은 1951년 10월 22일 널문리 주막마을에 천막을 치고 연락장교 접촉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휴전회담에는 한국어, 영어, 중국어가 공용어로 사용됐는데요.

중국 측 대표들도 찾아올 수 있도록 널문리 주막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판문점(板門店)'이라는 명칭이 붙게 됐습니다.


 ◈ 여기서 잠간 임진왜란때 도망치든(?),아니면 전술적으로 가상 피난을 하든, 조선역사에서 그리도 비판을 받고 백성을 버리고 줄행낭 치든, 비판의 화살을 받는 선조왕의 이야기를 해봅시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이 맞서 싸운 일본 군대는 이전에 변방을 침범해 노략질이나 하던 단순한 왜적이 아니었다. 일본군은 100년 이상 전쟁으로 단련된 당대 세계 최강의 전사(戰士) 집단이었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조선이 무너졌을 경우 일본군이 중국을 무너뜨리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라고 믿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실제 중국 역사에서 당대 세계 최고 강대국이자 인구 대국이었던 송(宋)나라와 명(明)나라는 소수의 만주족에게 망했다. 
 
일본 전국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오랜 준비를 거친 후 역량을 총동원해 조선을 침략했다. 당시 출정한 정예 일본군이 17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이에 반해 조선의 각 성(城)에 주둔한 군사는 2000명가량 되었다. 그나마 조선 측은 전쟁 준비가 되지 않았고, 전쟁 경험도 없었다.
 
부산에 상륙한 왜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올라와 도성(都城)을 점령하는 데 20일밖에 걸리지 않았다. 저항다운 저항 한번 못해보고 임금이 한밤중에 피난길에 올라야 할 정도로 급박한 상황이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선조는 4월29일 서둘러 광해군(光海君)을 세자로 책봉한 후 다음날 파천(播遷) 길에 올랐다.
 
선조의 피난 일행은 1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이어 선조는 개성과 평양, 영변을 거쳐 6월22일 압록강 바로 앞인 의주(義州)로 몸을 피했다. 이곳에서 선조는 요동으로 가고자 했지만, 대신들의 결사반대에 부딪혀 실행에는 옮기지 못하고 명(明)에 다급하게 원병을 요청했다.
 
도성을 버리고 의주까지 쫓겨간 모양새는 좋지 않았지만, 선조는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風前燈火)인 상황에서 의심 많은 명나라 황제를 설득해 조선파병을 이끌어 내는 데 성공했다. 1592년 12월 명나라 군사들이 속속 압록강을 건너면서 전세가 바뀌기 시작했다.

오늘날까지 역사학자들은  선조를 난도질해 비겁하고 우둔한 왕으로 해석하냐 하면 일편에서는 선조의 피난은 나라를 살리기 위한 전술이였을뿐 만약 한양에서 일본대군과 맞서 전투를 벌렸다면 조선의 왕이 일본에 포로가되여 조선이라는 나라는 영영 존재하지 않았을것이니 선조 그를 조선의 영웅으로추대하는 학자도 적지않다.

대국(大國)의 제왕과 소국(小國)의 제왕은 태생적으로 다르다. 대국의 제왕은 영토를 넓히는 데서 최고의 평가를 받는다. 반면 소국의 제왕은 물려받은 영토를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점수를 받아야 한다. 대국은 정복을 감행하는 것이 다반사였고 소국은 늘 침략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냉엄한 국제정치의 현실이다.

어쨋건 조선왕국의 명을 이어준 선조의 업적도 등 돌리기는 힘든일이다. 어찌보면 일본을 따돌릴 작전의선조의 전술로 오늘의 우리 선진국이라 자칭하는 대한민국이란  국가가 엄연히 지구상에 존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유리 할아버지 역사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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