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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명 목숨 빼앗은 "빨갱이" 낙인이 그저 농담이라니

수백명 목숨 빼앗은 '빨갱이' 낙인이 그저 '농담'이라니

입력 2018.05.11. 16:46 수정 2018.05.11. 20:16 댓글 54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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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 오늘] 58년 전인 1960년 5월 11일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유가족, 사건 당시 면장 살해

[한겨레]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왼쪽)와 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해결을 요구하는 농성 시위.

“주민 150여 명이 마을 면장을 잡아 실신시키고 생화장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다.”

58년 전인 1960년 5월 11일,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주민이자 유가족 100여 명이 묘비 운반을 위해 마을 뒷산에 모였다. 유골은 주인을 알 수 없이 뒤섞여 있었기 때문에 가장 큰 것은 남자, 작은 것은 여자, 아주 작은 것은 어린아이의 것으로 추슬러져 큰 묘 2개에 합장됐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내 부모와 내 아이의 유골을 직접 본 유가족들에게 10년 동안 사무쳐 온 원망이 폭발하고 말았다.

유가족들의 분노와 한은 사건 당시 면장이었던 박영보에게 향했다. 무고한 주민들의 죽음을 방관하고, 사건 이후에도 유가족들을 모른 체해온 박 면장이었다. 유가족들의 울분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그렇게 박 면장은 자신이 외면해온 마을 주민들로부터 끔찍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 사건의 뿌리는 1960년 기점에서 다시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경향신문> 1960년 5월 12일 치(왼쪽), <경향신문> 1960년 5월 13일 치.

사흘간 주민 719명 학살, 희생자 58%가 어린이와 노인

백선엽 백야전전투사령관이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전북남원시의 정보(G-2)상황실에서 열린 참모회의에서 지리산 빨치산 토벌을 위한 작전지도를 가리키고 있다. <한겨레> 자료 사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2월,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에서 국군 제11사단 소속 군인들이 마을 주민을 집단 학살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른바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박영보 면장은 사건 당시 군부대장의 명령으로 주민들을 분류하는 일에 참여했다. 주민들은 박 면장의 분류에 따라 군경 가족과 비군경 가족으로 나뉘었다. 이는 곧 희생자와 살아남은 자를 가르는 기준이 됐다.

500여 명의 무고한 주민들을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간 건 다름 아닌 한국군이었다. 지리산 인근의 빨갱이를 소탕한다는 게 명목이었다.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간 주민들은 그곳에서 한꺼번에 총살당했다. 학살극은 사흘 만에야 끝이 났다.

<한겨레> 자료 사진.

희생자 수는 확인된 것만 모두 719명에 달했다. 희생자 가운데 14살 미만의 어린이가 359명, 60살 이상 노인이 59명이었다. 58%가 어린이와 노약자였던 셈이다. 심지어 출생 신고조차 하지 않은 2살 미만의 젖먹이도 포함돼 있었다. 한국군은 수백 구에 달하는 주검들을 구덩이에 밀어 넣고 불을 지르기까지 했다. 사살된 어린이의 주검들은 학살 현장에서 2㎞ 가량 떨어진 계곡으로 옮겨져 암매장됐다. 사건이 조직적으로 은폐된 것이다.

안정애 전 진실화해위 조사관이 공개한 ‘특무대 문서철’의 일부. 사진 속 문서는 “9연대가 1951년 2월 7일 오전 11시께 산청군 금서면 방곡부락에 도착하자 부락민 7명이 근처 뒷산으로 도피하므로, 부락민을 전원 집결시켜 도피한 놈이몇 놈이냐고 물으니, 묵묵부답한 이유로 전원 총살시켰다”는 보고 내용이다. 안정애 씨 제공. <한겨레> 자료 사진.

한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은 거창군 신원면에 이어 산청군 금서면, 함양군 유림면 등 일대 8개 마을로 퍼져갔다. 살아남은 희생자 유가족들은 학살 사건을 외부에 말할 수 없었다. 사실을 말했다가는 빨갱이로 몰려 처단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국가에 의한 사건 은폐

당시 신원 국민학교에 소집됐던 대현. 중유리 주민 6백여 명이 끌려가 학살당한 탄량골 골짜기. <한겨레> 자료 사진.

사건이 처음 알려지게 된 건 비극이 발생한 지 50여 일이 지난 3월 29일이었다. 거창 지역 군수 출신인 국회의원 신중목은 익명을 쓴 희생자 유가족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신 의원은 편지 내용을 토대로 피해 사실을 국회에 보고했다. 보고 내용은 ‘2월 11일 동대대장 직접 지휘로 부락민을 신원국민학교에 집합하게 한 후 군·경·공무원과 유력인사의 가족만을 가려낸 뒤, 500여 명을 학살했다’는 내용이었다.

국회에서 조사단이 꾸려져 피해 지역으로 파견됐다. 그러나 당시 경남지구 계엄 민사부장이었던 김종원은 국군 1개 소대를 ‘빨갱이’ 인민군으로 위장해 거창읍 내에서 신원면으로 향하던 국회 조사단을 습격했다.

제대로 된 조사조차 이뤄지지 않은 채 사건은 은폐되는 듯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에 와 있던 외신 기자들이 사건을 보도하면서 세간에 알려지게 되었다. 사건이 알려지자,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에 대해 담화문을 발표한다. 이승만은 담화문에서 ‘희생자들은 빨갱이 협력자로 군법회의에 넘겨 처형한 사건’이라고 거짓 발표한다.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때 이승만 정권의 계엄민사부장 김종원은 여론이 비등하자 체포됐으나 이후 재임용돼 치안국장까지 승진했다.

이후 국회 차원에서 진상조사가 재개되어 내무부와 법무부, 국방부장관이 사임하고 관련자들은 직위 해제되었다. 하지만 무기징역과 사형 등을 선고받았던 사건의 핵심 인물들은 이승만의 특별 사면으로 석방됐다. 게다가 경남지구 계엄사령관 김종원은 경찰 간부로 특진됐다. 반면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의 유가족들은 억울한 가족들의 죽음을 호소하지도 못한 채 통한의 세월을 살아야 했다.

비극이 일어난 지 10여 년 후인 1960년, 반독재 민주주의 운동인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은 막을 내리게 됐다. 이를 계기로 이승만 독재 정권에 의해 은폐·조작돼 왔던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의 진상 규명 움직임도 일어났다.

독재 정권에 막힌 ‘진상 규명’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 현장에서 유가족들만으로 치러진 위령제. <한겨레> 자료 사진.

‘거창 민간인 학살 사건’은 10여 년이 지나도록 유골조차 수습되지 못한 채 방치됐다. 1960년 3월 5일에서야 유가족을 중심으로 한 합동묘역 건립추진위원회가 구성됐다. 같은 해 11월 박산 합동묘역에 위령비가 제막돼 유가족의 한이 조금이나마 풀어지는 듯했다.

거창 양민학살 사건의 해결을 요구하는 농성 시위. <한겨레> 자료 사진.

하지만 이 분위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1961년 박정희 군사정권은 유족회 간부 17명과 사건의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이들을 모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박정희의 합동묘역 개정 명령에 따라 묘역은 파헤치고 위령비는 땅에 파묻어 버렸다.

특별법 통과는 됐지만, 남은 건 ‘빨갱이’ 낙인

<한겨레> 1996년 10월 21일 치.

이 사건의 보상이 다시 논의되기 시작한 건 1996년에 이르러서였다. 당시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 회복에 관한 특별 조치법’이 제정되어 명예 회복과 위령 사업을 벌이게 됐다. 하지만 이 또한 미비한 점이 많았다. 법원은 이미 시효가 지난 사건이라며 국가배상 의무가 없다는 판결을 내렸다.

<한겨레> 2004년 3월 24일 치.

이런 상황에서 2002년 일부 국회의원들이 특별조치법을 재발의했다. 2004년 3월, 가까스로 국회를 통과했지만 당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정국이었다. 고건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은 ‘한국전쟁 관련 피해 보상이 통과되면 국가재정에 부담이 된다’는 이유를 들어 거부권을 행사했다. 이후 16,17,18대에 걸쳐 국회를 통과했지만 정부는 ‘국가재정의 부담’을 들어 보상을 거부하고 있다.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과 더불어 희생자 유가족들에게 ‘명예 회복’은 배상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들은 군사 독재 정권 탓에 한국군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도 말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런 이들에게 남은 건 ‘빨갱이 후손’이라는 낙인뿐이었다.

그런데 이런 아픔을 안고 있는 지역을 도지사로 대표했던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가 최근 ‘빨갱이 발언으로 논란이 일자 “경상도에서 반대만 하는 사람을 두고 우리끼리 농담으로 ‘빨갱이 같다’고 한다”고 말했다. 이런 말을 ‘농담’으로라도 입에 담을 수 있는 걸까.

강민진 기자 mjkang@hani.co.kr

연재역사 속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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