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쓰는 인간의 아름다움 <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 lore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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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울의 ‘그림을 읽다’] 읽고 쓰는 인간의 아름다움
‘읽기’의 즐거움을 색채로 찬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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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을 파괴하기 위해 굳이 책을 불태울 필요가 없다. 그저 사람들에게 책을 읽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다. - 레이 브래드베리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고, 누구도 만날 필요 없이, 가만히 외로움을 잊는 기술. 내게는 그것이 책 읽기다. 아끼는 책 한 권만 옆에 있어준다면, 외로움은 더 이상 고통이 되지 않는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저자와 대화하고, 책 속의 여러 인물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느낌에 미소 짓기도 한다. 그들은 지금 여기 있다. 내가 책 속의 문장을 읽음으로 하여, 그들은 이 세상에 더욱 생생하게 존재하게 된다. 책은 인간의 외로움을 잊게 하지만, 책 스스로는 매우 외롭다. 인간이 만져주고, 읽어주고,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면, 책은 그저 ‘사물’에 그치기 때문이다. 책 속에 숨은 이야기와 생각, 느낌과 흔적들에 생명을 불어 넣는 독자가 없다면, 책은 우리 자신보다 더욱 외로운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책과 함께하는 순간, 우리는 곁에 사람이 없어도 ‘추억’을 만들 수 있다. 책 속에 끼워두었던 껌종이나 낙엽, 꽃잎 같은 것들이 툭 떨어지는 순간. ‘그 책을 읽었던 순간의 나’는 또 하나의 친구가 되어 다정하게 말을 걸곤 한다.
엘링가 피터 얀센스, <책 읽는 여인>, 16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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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홀로 추억을 만드는 과정 |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 <책 읽는 소녀>, 1770년경
책 속에 과연 어떤 내용이 있기에 소녀의 볼은 저토록 발그레해져 있을까. 소녀의 복숭아 빛 뺨은 책 속의 내용 때문일 수도 있고 본래의 홍조일 수도 있지만, 앞모습이 아닌 옆모습으로 그려져 더욱 신비로운 느낌을 주는 이 그림은 소녀가 읽고 있는 책 내용을 궁금하게 만든다. 이상적인 옆모습을 그리기 위해 다소 작위적으로 포즈를 취하게 한 듯한 느낌도 주지만, 커다란 라일락 빛깔의 쿠션에 상반신을 기대고 책 속에 푹 빠져 있는 소녀의 모습은 지극히 사랑스럽다.
책 읽는 소녀의 모습을 그린 그림은 18세기에 본격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다. 18세기 유럽에서는 여성들 사이에서 일종의 독서 혁명이 일어났다. 그 중심에는 ‘소설’이 있었다. 특히 <파멜라>라는 서간체 소설은 지금까지 문학에 무관심했던 여성들에게서 놀라운 반향을 일으켰다. 뭇 남성에게 순결을 위협받는 하녀 파멜라가 결국 자신이 원하는 사람과 결혼에 성공하는 이야기는 수많은 여성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었다고 한다. 유럽의 공원이나 유원지에서는 소설 <파멜라>를 들고 다니는 여성들의 모습이 흔히 목격되었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전 유럽에 걸친 폭발적인 인기를 방불케 할 정도로, <파멜라> 열풍은 대단한 것이었다. 여성들에게 ‘책을 읽는 행위’는 단순한 흥미거리를 넘어 ‘나도 어쩌면 다른 삶을 살 수 있지 모른다’는 집단적인 희망에 불을 지피는 ‘삶의 새로운 방식’이었다.
얀 베르메르, <푸른 옷을 입고 편지를 읽는 여인>, 1664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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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읽고 쓴다는 일의 소중함
기분 좋은 말을 생각해보자.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기분 좋은 말을 소리내보자.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머릿속에 가득한 기분 좋은
느낌표를 밟아보자.
느낌표들을 밟아보자. 만져보자. 핥아보자.
깨물어보자. 맞아보자. 터뜨려보자!
-황인숙 ‘말의 힘’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읽고 쓴다는 것은 정말 진지하고 심각한 경험이었다. 나는 모든 것을 읽고, 또 읽었다. 동화책이나 소설책, 어른들의 잡지는 물론 껌종이에 적힌 서정시, 과자나 라면의 성분분석표까지 샅샅이 뒤져 읽었다. 방학 동안 일기를 쓰거나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것은 물론 힘들었지만 뭔가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읽고 쓴다’는 것은 틀에 박힌 입시 공부와 달리 뭔가 흥미롭고 소중한 체험이었다. 그때는 활자매체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기 때문에 교과서 외의 활자를 마주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보다 훨씬 흥미로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훨씬 많은 활자와 이미지를 접하는 지금, 나는 왠지 ‘말의 힘’을 잃어가는 것 같다.
황인숙 시인의 ‘말의 힘’을 읽어보니 더욱 더 단어 하나하나의 힘, 문장 하나하나의 힘을 잊어가는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 기분 좋은 말들은 단순하고 소박하다. 파랗다, 하얗다, 깨끗하다, 싱그럽다, 신선하다, 짜릿하다, 후련하다. 이렇게 원시적인 체험을 담은 투명한 말들의 단단한 질감을 나는 잊어가고 있었다. 그렇지, 기분 좋은 말은 그저 눈으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하나하나 발음해 보아야 한다. 시원하다, 달콤하다, 아늑하다, 아이스크림, 얼음, 바람, 아아아, 사랑하는, 소중한, 달린다, 비! 나는 그 모든 말의 고유한 울림과 향기를 잊어가고 있었다. 바로 그렇게 활자화된 단어 하나하나를 천천히 쓰다듬고, 깨물어 보고, 씹어도 보고, 핥아도 보는 촉감적인 즐거움을 나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옛사람들이 글을 읽고, 쓰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면, 오래전부터 잊고 있었던 그 단순한 ‘활자 맛보기의 즐거움’이 다시 되살아난다. 우리가 매일 무덤덤하게 마주하던 수많은 활자를 더욱 애지중지하고 싶어진다.
가브리엘 메츠, <편지를 쓰는 남자>, 1664~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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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와 청자를 공동체로 맺어주는 낭독의 매력 | 줄리어스 르블랑 스튜어트, <낭독>, 1883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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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학창 시절에 할머니는 지루함을 못이겨 도서관에서 <파멜라>를 시리즈로 빌려 읽기 시작했다. 할머니는 원래 소설을 읽는 분이 아니었다. 결코 소설 따위는 읽지 않았을 분이었다. 그러나 ‘파멜라: 또는 보답받는 미덕’ 이라는 제목 뒤에 그런 내용이 숨어 있을 줄 어찌 짐작이나 했으랴. 할머니는 소설 속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성경 구절처럼 고스란히 믿었다. 겨울밤이면 차를 마시고 나서 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책을 큰 소리로 읽어주었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자신이 읽는 내용에 완전히 충만해서, 단락단락을 가슴 깊숙이 받아들이고 일일이 코멘트를 달았다. 읽으면서 결코 쉬지 않았으나, 저자가 마법을 걸다시피 독자들의 가슴을 절절하게 만드는 부분을 만나면 목이 막혀 입술을 떨면서 더 이상 읽어나가지 못했다. 가슴이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슈테판 볼만, <여자와 책>(유영미 옮김, 알에이치코리아, 2015) 중에서
로렌스 알마 타데마, <호메로스의 낭독>, 1885
#3. 읽고 쓰고, 그리고 깊어지는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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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로드 모네, <책을 읽는 여인>, 1872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독서야말로 최고의 피난처라는 생각이든다. 누구도 그녀의 독서를 방해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녀는 책 속의 또 다른 세상에 완전히 몰입해 있으므로. 그녀는 책 속의 세계에 빠져들어 있기에, 책과 그녀 사이에는 그 어떤 불순물도 침입할 수 없다. 이렇듯 독서는 시끄러운 세상을 향한 방패막이 되어준다. 독서는 누구도 쉽게 뚫고 들어올 수 없는 든든한 마음의 요새가 되어준다. 내가 읽고, 내가 이해한 것은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는 마음의 자산이다. 그리하여 독서를 하는 사람은 침묵 속에서 오히려 강인해진다. 좋은 책을 읽고 나면 마음속이 엄청나게 수다스러워진다. 하고 싶은 말이 용솟음친다. 내면에는 수많은 할 말이 요동치고 있지만, 오래오래하고 싶은 말을 묵혀 둔 채, 독서의 감동을 숙성시키는 것이 좋다. 감동은 곧바로 표출하기보다 숙성과 발효의 과정을 거쳐 천천히 표현하는 것이 좋다. 강의를 하거나 글을 써야 할 때는 더욱 그렇다. 무언가를 표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더욱 사려 깊게, 더욱 심사숙고하여 자신의 감동을 무르익게 만들어야 한다.
찰스 다나 깁슨, <그들의 첫 번째 싸움>, 1914
옛 사람들에게 독서란 소리 내어 읽고, 또 읽는 것이었다. 단순한 낭독을 넘어 성독(聲書)이었다. 성독은 노래하듯이 읽고 또 읽어 그 내용이 완전히 몸과 마음에 샅샅이 스며들도록 반복하여 읽는 것이었다. 최소한 100번 이상 소리 내어 읽으면, 그 어떤 글이라도 숨겨진 행간의 의미까지 가슴 깊이 스며들지 않겠는가. 이렇게 소리 내어 읽는 것이 일상다반사였던 옛사람들의 독서와 달리, 현대인의 독서는 주로 지극히 조용하고 개인적인 묵독을 의미하는 것이 되었다. 이 그림은 흥미롭게도 ‘커플의 첫 번째 싸움’을, 남녀가 따로따로 책을 읽는 ‘묵독’의 장면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들이 싸우지 않았더라면, 누군가는 읽어주고, 누군가는 들어주며 아름다운 낭독의 공동체를 이루지 않았을까? 이 커플은 지금 서로에게 토라진 몸짓을 ‘묵독’으로 표현하고 있다. 우린 이미 싸웠으니까, 다정하게 함께 책을 보는 일은 할 수 없다는 ‘배제’와 ‘고립’의 몸짓이 바로 묵독인 것이다. 소리 내어 글을 낭독하는 것은 가족끼리 함께 있을 때 자주 있는 일이었다. 누군가 책을 소리 내어 읽어주면 다른 사람들은 살림을 하거나 또 다른 일에 몰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누군가 소리 내어 글을 읽어준다는 것은 ‘우리가 각자 혼자가 아니라는 것, 우리가 함께 한다는 것’을 전제할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바네사 벨, <버지니아 울프>,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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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칼 앞에서 인간은 쓰러지고, 너무도 충격적인 현실의 사건 앞에서 인간의 영혼은 무너지지만, ‘글’로 표현된 상처는 우리로 하여금 그 이야기의 ‘의미’와 ‘파장’을 생각하도록 만든다. 바로 그 집단적인 거리, 심리적인 거리가 치유를 시작하게 만들 수 있다.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판단. 더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나 또한 작은 발걸음이나마 내디뎌야 한다는 결단. 내가 바뀌면 세상도 조금씩 바뀔 수 있다는 믿음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
‘자기만의 방’을 얻기 위해 분투했던 버지니아 울프는 이 세상 수많은 여성에게 ‘자기만의 방’을 향한 투지를 일깨워주었을 뿐 아니라 ‘자기만의 방에서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었다. 자기만의 방을 얻기까지의 과정이 ‘경제적 독립’이라면, 자기만의 방을 얻은 후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은 ‘영혼의 독립’을 실천하는 일이다. 힘들게 얻은 자기만의 방 안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것인가. 버지니아 울프는 읽고, 쓰고, 또 읽고 쓰는 길을 택했다. 그 길 또한 이 세상 어느 길 못지않은 가시밭길이었지만, 직장 상사에게도, 대중 독자에게도, 출판사에게도 눈치를 보고 싶지 않았던 그녀는 영혼의 완전한 독립을 평생의 과제로 선택했다. 그 길을 선택함으로써 그녀는 이 세상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는 자유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다.
내게 ‘읽고 쓰는 것’은 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미로에서 ‘나 자신의 길’을 찾는 방법이다. 그런데 그 광대한 미로 속에서 나만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아리아드네의 실’은 하나의 길로만 통해 있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으로 가는 길, 그 가장 어렵고 복잡한 길은 내가 어떻게 항로를 수정하는지에 따라, 내가 어떻게 세상을 향한 주파수를 맞추는지에 따라, 매번 변화할 수 있다. 휴대폰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매일 읽고 쓰는 삶’을 이미 실천하고 있다. 문제는 어떤 글을 읽고, 쓸 것인가이다. ‘어떤 글을 읽고 쓰는가’가 ‘어떤 삶을 살 것인가’를 결정한다.
글쓰기란 누군가의 고독이 타인의 고독을 향해 말을 거는 몸짓이다. 우리가 혼자 있을 때, 우리가 외로울 때, 글쓴이의 마음이 더 잘 들리는 것은 독서가 필연적으로 ‘몰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나는 마음이 산란해질 때마다 눈앞에 보이는 아무 책이나 집어 아무 페이지나 펼쳐 소리 내어 읽기 시작한다. 낭독은 나의 고독이 나 자신을 향해 말을 거는 몸짓이다. 사람들 앞에서 소리 내어 글을 낭독할 때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도 그 글을 읽어주고 있는 셈이다. 나 자신을 향한 목소리가 낭독을 통해 울려 퍼지는 순간, ‘목소리’는 ‘눈’보다 훨씬 많은 의미와 여운을 실어 나른다. 읽기와 쓰기를 통해 삶의 의미를 한 올 한 올 직조해나갈 수 있다는 희망. 그 희망이 우리로 하여금 끊임없이 무언가를 읽고 쓰고 다듬고 고치게 만든다. 내가 쓰는 글 속에는 좀 더 희망차고, 좀 더 용감해진 내가 들어차 있기를. 내가 읽는 글 속에, 내가 쓰는 글 속에 ‘어제보다 나아진 나’를 담을 수 있기를.
정여울 - 작가, 문학평론가. 1976년생. 서울대 독문과 졸업 후 같은 대학에서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2004년 <문학동네>로 등단했다. 저서로 <공부할 권리>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 <마음의 서재> <헤세로 가는 길> 등이 있다.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수상했다.
댓글 5
유리할머님 그림속에 시가 있다면 시 안에는 그림이 있는것이 아닐런지요
아마 선생님도 젊은시절에 몇번은 노래하셨던 시가 아닐까 합니다
추석을 맟아서 정지용 시인의 향수로 안내하여 드리겠읍니다.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말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마음
파아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반가운 추석 명절에, 서글피 느껴지는 추석 명절!!!
실향민이란 ? 고향을 잃은 사람을 말하거늘 반세기를 이곳에서 보내 늙어버린
나에겐 이민 실향자란 말이 더 가슴에 와닿는것 같습니다. 향수, 그리움,Saudade
실감이 나지않는 추석이지만 우연일까...
오늘이 돌아가신 모친 기일 이라 오십넘은 아들녀석과 마흔넘은 딸아이가 직장도
일찍 조퇴하고 찾아주어 할머니의 영정을 모시고 우리가족 넷이서 한사람 한사람
절하며 그리움의 말을 전하며 향을 피여 올렸습니다.
자식을 키워보니 부모의 은혜를 뼈쏙까지 느끼며 많은 참회를 하게 되였습니다.
단 한번 왔다가는 이세상, 단한번 맺여진 자식과 부모관계, 내자식을 자식으로
취급하기보단 한 인간으로 존경해 그들의 친구가 되고플 뿐입니다.
이제 이세상에서 가족의 인연을 맺고 해여질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세상
에서 내자식으로 태여나준것 감사하고 오늘 소생이 어머님 기일에 돌아가신 어머님
의 자식으로 태여나서 너무나 행복했다고 영정을 바라보며 이야기 했습니다. 오늘
따라 명절에 사무치는 향수가 깊어가는 이밤 아련한 옛 추억에 잠기며 하염없이
눈물이 고이며 이제 너무 많이 살아왔다 느껴집니다.
-서글픈 추석날 밤에, 유리 할아버지-
아...선생님 너무많이 사셨다니요.아드님 따님이 선생님의
그 마음을 아신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요? 꿈에서도 그런 마음일랑은
접어 두시는것이 좋다고 사료됩니다.
부디 강건하게 오래 사시는것이 주변분들을 편안하게 하시는 걸로 생각하시고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에 너무깊이 애통을 하시지 않는것이 망자를 위해서도
좋은일이 아닐런지요?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 고국은 하늘은 높고 말은 살이 찐다는
천고마비의 계절입니다 계절을 반대로 가는 브라질은 이제 곧 여름이 오겠지요
뜨거운 태양아래서 더욱 정열적인 선생님의 활동을 기대하고 있읍니다.
지나간 젊은 날, 유럽 어느 학교 공중전화에서 밤에 아내에게 국제전화를 걸며 소리치며
'사랑해'를 왜치든 그때 모든 행복을 내 두손에 쥐고 있는듯 더 욕심을 내며 조금만더, 조금
만 더 성공을 위해 달리든 시절이 이젠 기억하기도 힘들게 아련해집니다.
역시 건강한 몸에 건전한 정신이라고, 이젠 모든것이 예전같지 않으니 'feel the futility of life'
사는 인생이 힘들고 피곤하고 내일에 대한 계획을 하지않게 됩니다. 역시 서글픈 추석명절은
Melancholy 를 선물해 주는 모양입니다. 살아있다는게 신기하고 감사할뿐이지요.
살아생전 밥만 먹고살면 살아있는 시체지...가끔은 차분히 명화를 감상하며 그림속에 숨어있는
시와 소설을 내나름대로 읽는것이 금상첨화(錦上添花), 화룡점정(畵龍點睛) 이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