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업작가 - 장석주의 ‘日常반추’] 사랑은 아무나 하나! 에서 일부추출
- lorenj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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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대상은 삶의 빛이고, 내 몸의 불이다. 사랑이 불안과 혼란의 중심에 있었지만 낭만주의적 전설에 감싸였던 그 시절에는 누구나 거침없이 사랑을 했다. 그런데 그 쉬웠던 사랑이 오늘날 어려운 게 되고, 그 많았던 사랑이 자취를 감춰 희귀한 것이 되어버렸다.
오늘날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다. 사랑은 돈, 신체, 재능과 크게 상관이 없는, 갈증과 욕망으로 촉발된 사랑을 그 무엇도 아닌 사랑으로 향유하는 능력이다. 사랑은 숭고한 것이고, 그것은 유한한 인생의 시간 속에서 거의 유일하게 영원성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오늘날 에로스와 타나토스를 오가는 사랑은 죽었다. 살과 살의 스치고 부빔, 혀의 엉긺, 젖가슴의 움켜쥠, 허리와 엉덩이를 쓰다듬기, 서로의 몸을 핥고 물어뜯기 등과 같은, 흥분과 열락으로 몸을 떠는 에로스 없는, 사랑과 본능이 하나로 결합하여 몸이 팽팽해지고 저절로 떨고 움직이는 열정 없이 메마른, 혼 없이 나누는 사랑만이 남았다. 그 혼 없는 사랑의 본질은 다만 성애화되어 소비되는 섹스, 전시되는 상품으로서의 포르노다.
사랑은 ‘나’와 성별이 다른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은 타자의 매혹에 이끌림에서 비롯한다. 사랑의 촉매가 되는 매력에 불을 붙이는 것은 타자의 다름이다. 타자에게 다름이 없다면 사랑도 일어나지 않는다. 타자의 다름은 사랑의 전제조건이다. 에로스에 불길을 당기는 것, 즉 가장 강렬하게 경험되는 타자의 매혹은 입술, 눈동자, 젖가슴, 허리, 엉덩이 등등의 육체의 매혹이 선사하는 섹스에의 욕망이다.
사랑의 전제조건이 되는 것, 꼭 필요한 단 하나의 매혹은 무엇인가? 필립 로스의 소설 <죽어가는 짐승>에서 화자는 이렇게 말한다. “꼭 필요한 매혹은 섹스뿐이야.”라고! 매혹적인 육체의 움직임들, 나이든 교수와 사랑에 빠지는 스물네 살짜리의 여자의 행동은 어떤 것인가? “구체적이면서도 신비했고, 묘하게도 놀랄 만한 작은 것들이 가득했어.” 사랑이란 종종 대상에 대한 과장이고 과잉의 의미 부여다. 모든 사랑은 크건 작건 간에 “전략적인 상호 기만에 의존한다”(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앞의책, 176쪽)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상대의 단점은 축소하고 장점은 확대한다. 상대를 매혹의 존재로 새롭게 빚어내는 것이다. 만약 이런 빚어냄이 없다면 많은 사랑은 시작하기 전에 시들고 말 것이다.
에로스가 사라진 사회에서는 포르노가 판을 친다. 포르노는 한마디로 속화된 현대의 사랑이다. 포르노는 섹스의 과잉이 아니라 섹스의 부재를 가리킨다. 포르노에는 성기의 결합만이 있을 뿐 에로스가 깃들 여지가 없다. 포르노는 섹스의 공회전이다. 아무리 액셀레이터를 밟아도 앞으로 전진하지 않는 자동차나 마찬가지다. 포르노의 음란함은 바로 성애의 부재에서 비롯한다. 죽음까지 치달을 수 있는 욕망의 뜨거움이 제거된, 차가운, 오직 성적 긴장을 해소하기에 급급한, 그렇게 소비되는 섹스와 포르노그라피는 진짜 사랑을 침식하고 파괴한다.
사랑은 행복이고 고통이며 혼란이다. 사랑이 초래하는 혼란은 그것이 “인간의 영역과 신의 영역을 넘나들고 유한과 무한 사이에서 방황하는 경험”(로버트 롤런드 스미스, 앞의책, 177쪽)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갈망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사랑을 얻지 못한 사람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에 빠진다. 그것의 병적 징후가 우울증이다. 철학자 한병철은 이 나르시시즘적 우울증에 빠진 자는 “자기 자신 속으로 침몰하고 그 속에서 익사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이들은 왜 그토록 사랑한다 는 말을 하고 싶어 하고 듣고 싶어할까?
사랑에 빠지면 사랑은 배가 고파도 식욕을 느끼지 못하는 이상한 질병이다. (유리 할머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