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학교 MBA


logo

 
banner1
친구를 찾아요. ( ㅈ ... 2022-04-05
네네치킨 2022-03-30
시황 2022-03-29
순위 닉네임 포인트
1위 lorenjo 50226점
2위 허나우도 25020점
3위 bonmario 21110점
4위 은행나무 20855점
5위 핵폭탄 16062점
6위 DAVIRHIE 10570점
7위 관리봇 9540점
8위 지아나 9085점
9위 한비 4835점
10위 uno 4805점

자유롭게 의견을 게시 할 수 있는 열린공간입니다.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한국 섬유 산업사 - 03] 60년대 '서문시장'을 아십니까?

s_title05_005.gif
text_05_17.gif
s_05_10.gif1960년대 대구지역의 섬유산업발전은 가히 산업혁명에 비유될 만 하다.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6)에 따라 내수 위주 산업이 수출 위주 산업화 되고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1971)으로 수출전략산업화 됐다. 섬유공업이 전략산업으로 육성되면서 상업 자본이 공업 자본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직물 도매업자들이 대거 직물 제조업에 손을 대면서 섬유공업 성장에 결정적 기회를 부여했다.
 
text_05_18.gif
한때 전국의 직물시장을 주름잡던 서문시장. 
그러나 직물도매시장으로서의 기능은 서문시장보다 동산동일대가 훨씬 앞서 형성됐다. 
말전거리라 불리기도 한 동산동일대는 일제시대부터 해방 이듬해까지 직물 도매시장으로 번창했는데 현 동산파출소 주변은 직물 도매시장으로, 약전골목 주변은 직물 소매시장으로서의 기능을 했다. 
해방 3년째부터 봇짐장수들의 몰락으로 서시에 상권이 이양되면서 비정상 루트로 나오는 면사, 나일론사 등이 거래돼 블랙마킷이라는 오명이 붙여지기도 했다.

한편 1948년부터 동산동 직물시장 상권을 이양받은 서시, 즉 서문시장은 급속도로 번창해 1968년 직물 도매상 전국 점유비율 24.4%에 이르게 됐다. 
이후 1971년 33.7%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섬유산업의 양적 증가는 품질 저하를 초래했다. 
원사부족에서 오는 원사파동, 기능공 스카웃의 과열, 동업자간의 과당경쟁 등이 생산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생산성 저하와 질적 저하로 이어졌다. 이에 섬유류에 대해서도 품질검사제도를 시행하게 됐다.

 
text_05_19.gif
s_05_11.gif1957년 12월 상공부는 수출검사법을 제정하고 상공부장관이 지정하는 수출품목에 한해 품질검사제도를 시행했다. 1962년 면사 및 면제품이 최초의 섬유류 검사품목으로 지정되면서 대한메리야스연합회와 대한직물공업연합회가 자체적으로 검사기관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

1964년 1월 한국섬유시범검사소가 공식 지정되고 견직물, 인격직물, 합성직물, 교직물에 대해 수출검사를 하면서 자수직물, 코듀로이직물, 타월직물에 대한 검사까지 확대실시하자 상공부는 검사기관을 독립법인화 시키도록 했다.

당국이 검사기관을 독립법인으로 만든 이유는 협회나 연합회 예속에서 오는 검사의 존엄성 및 독립성 실추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후 니트 및 의류 검사소도 각각 독립 법인화 됐는데 대구에 검사소 지소가 문을 연 것은 1970년 4월 27일이다. 훈련된 검사요원이 각 공장에서 생산되는 직물을 정밀검사하고 종합분석해 취약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줌으로써 대구는 물론 국내 섬유제품의 품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text_05_20.gif
통계에 따르면 1963년도 대구 섬유 수출이 2백34만8천 달러로 대구시 전체 수출 2백57만5천 달러의 92%나 차지했다. (그후 나일론 타프타 수출이 늘면서 1967년 대구 섬유 수출은 2천4백51만 달러를 기록, 천만불대를 뛰어넘게 됐다.)
수출 드라이브정책에 힘입어 섬유업체 수가 증가하자 경북직물공업협동조합의 견직업자들과 면직업자들간에 알력이 표면화돼 1969년 견직업체들이 따로 경북견직물조합을 결성, 오늘에 이르게 됐다.

메리야스조합과 염색조합까지 모두 4개의 섬유관련 조합이 1960년대 결성됐다. 
경북메리야스공업협동조합에서는 1969년 6월 기업의 다각화를 통해 생산성 향상과 수출가격의 적정유지 방안을 모색, 추진하고자 경북스웨터단지를 제 3공단에 조성했는데 제 3공단의 정식 명칭은 대구지방공업단지이다.

대구에 공단이 처음 조성된 곳은 대한방직이 자리한 침산동일대. 
침산동의 제 1공단만으로는 공장수급이 어려워지자 도심의 상가나 주택가에 공장들이 무질서하게 들어서게 됐고 이에 건설부가 일종의 복합 공업단지로 조성한 것이 제 3공단이다. 건설부로부터 특별단지 허가를 받아 대구시가 기반을 조성하고 68년 12월 말 완공됐다.

 
text_05_21.gif
s_05_12.gif공단 조성에 따른 원사공장의 증설로 나일론 생산량은 더욱 증가했다. 수입 사용하던 나일론사를 1968년 한국나일론이 7.5톤 증설, 10톤을 생산한 이후 1964년 7월 경기도 안양의 한일나일론(이후 동양 나일론이 흡수)이 1.35톤의 나일론 필라멘트사 생산시설과 1968년 동양 나일론 울산공장의 7.5톤 생산시설이 증설되면서 국내 충당이 그럭저럭 가능해졌다. 
당시 나일론 직물의 인기는 나일론처녀 등의 속어까지 등장시킬 정도로 대단했다.
대부분의 부녀자들은 나일론 치마 저고리를 입어보는 것이 소원일 정도였고 일
제 나일론점퍼를 입으면 상류층으로 인식될 정도였다.
처음 나일론직물을 짤 때 호부가 안돼 고전했는데 일본놀이라고 불리웠던 나일론사 한가닥씩에 풀을 먹이는 방법으로 제직했다. 나일론사 1파운드를 사용해 천을 짜면 10파운드의 나일론사를 살 수 있을 정도로 이윤이 좋았던 한편 수출용 나일론사 가격과 내수용 나일론사 가격차이가 4∼5배나 돼 일부 업체들은 수출용 나일론사를 시중에 빼돌리다가 쇠고랑을 차기도 했다.
 
text_05_22.gif
s_05_13.gif나일론 타프타로 한몫 보던 대구 섬유업계가 폴리에스터 직물을 본격적으로 생산한 것은 1970년대 초 부터다. 1960년대 후반에도 일본의 테이진과 동양레이온이 영국의 ICI로부터 기술을 도입, 테트론이란 상표의 원사를 조금씩 수입해 와 폴리에스터직물을 짰지만 1969년 선경이 수원에 7톤 규모의 폴리에스터사를 생산하고 난 후부터 조젯직물 등이 나오게 됐다. 원래 폴리에스터사는 경산 대한화섬에서 방사시설만으로 폴리에스터 SF사를 생산한 것이 국내 효시이지만 선경이 생산한 이후 삼양사 등에서도 생산에 참여하면서 본격화됐다. 대구 섬유업계가 폴리에스터 직물을 대량으로 제직하기 시작한 것은 EXPO '70 이후 부터다.

door.jpg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kakao talk
퍼머링크

댓글 0

댓글 쓰기

에디터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삭제하시겠습니까?

상호명 : 투데이닷컴(웹)/한인투데이(일간지) / 대표자 : 인선호 / E-Mail : hanintodaybr@gmail.com/webmaster@hanintoday.com.br
소재지 : R. Jose Paulino, 226번지 D동 401호 - 01120-000 - 봉헤찌로 - 상파울로 - 브라질 / 전화 : 55+(11)3331-3878/99721-7457
브라질투데이닷컴은 세계한인언론인협회 정식 등록사입니다. Copyright ⓒ 2003 - HANINTODAY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