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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 대구지역의 섬유산업발전은 가히 산업혁명에 비유될 만 하다. 정부의 제1차 경제개발계획(1962∼1966)에 따라 내수 위주 산업이 수출 위주 산업화 되고 제2차 경제개발계획(1967∼1971)으로 수출전략산업화 됐다. 섬유공업이 전략산업으로 육성되면서 상업 자본이 공업 자본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특히 서문시장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직물 도매업자들이 대거 직물 제조업에 손을 대면서 섬유공업 성장에 결정적 기회를 부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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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전국의 직물시장을 주름잡던 서문시장. 그러나 직물도매시장으로서의 기능은 서문시장보다 동산동일대가 훨씬 앞서 형성됐다. 말전거리라 불리기도 한 동산동일대는 일제시대부터 해방 이듬해까지 직물 도매시장으로 번창했는데 현 동산파출소 주변은 직물 도매시장으로, 약전골목 주변은 직물 소매시장으로서의 기능을 했다. 해방 3년째부터 봇짐장수들의 몰락으로 서시에 상권이 이양되면서 비정상 루트로 나오는 면사, 나일론사 등이 거래돼 블랙마킷이라는 오명이 붙여지기도 했다.한편 1948년부터 동산동 직물시장 상권을 이양받은 서시, 즉 서문시장은 급속도로 번창해 1968년 직물 도매상 전국 점유비율 24.4%에 이르게 됐다. 이후 1971년 33.7%에 이르게 되는데 이러한 섬유산업의 양적 증가는 품질 저하를 초래했다. 원사부족에서 오는 원사파동, 기능공 스카웃의 과열, 동업자간의 과당경쟁 등이 생산질서를 문란하게 하고 생산성 저하와 질적 저하로 이어졌다. 이에 섬유류에 대해서도 품질검사제도를 시행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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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7년 12월 상공부는 수출검사법을 제정하고 상공부장관이 지정하는 수출품목에 한해 품질검사제도를 시행했다. 1962년 면사 및 면제품이 최초의 섬유류 검사품목으로 지정되면서 대한메리야스연합회와 대한직물공업연합회가 자체적으로 검사기관 설립을 추진하게 됐다. 1964년 1월 한국섬유시범검사소가 공식 지정되고 견직물, 인격직물, 합성직물, 교직물에 대해 수출검사를 하면서 자수직물, 코듀로이직물, 타월직물에 대한 검사까지 확대실시하자 상공부는 검사기관을 독립법인화 시키도록 했다.
| | 당국이 검사기관을 독립법인으로 만든 이유는 협회나 연합회 예속에서 오는 검사의 존엄성 및 독립성 실추를 막기 위해서였다. 이후 니트 및 의류 검사소도 각각 독립 법인화 됐는데 대구에 검사소 지소가 문을 연 것은 1970년 4월 27일이다. 훈련된 검사요원이 각 공장에서 생산되는 직물을 정밀검사하고 종합분석해 취약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줌으로써 대구는 물론 국내 섬유제품의 품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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