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와중에서도 대구 화섬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기 이전인 1950년대 중반 나일론, 아세테이트 등 화섬직물에 손을 댄 업체가 상당수 생겨났다. 전쟁으로 인해 모든 산업이 파괴돼 원료 수급에 어려움을 겪던 대구 섬유업자들은 일본과 미국에서 인견사, 스프 등의 원료를 수입해 모스린을 제직했고 간간이 나일론, 아세테이트사도 수입해 화섬직물을 생산했다. 당시에는 물건이 있는대로 팔려나가던 시기여서 원료의 수입이 곧 기업의 성장과 직결돼 원료수입을 위해 선달러 구하는 문제가 관건이었다.정부가 원조로 들여온 달러를 입찰을 통해 민간에 불하했는데 대구 섬유업자들도 달러 낙찰을 보기 위해 대거 상경했다. 인견,아세테이트,나일론 등을 낙찰된 달러로 주문하면 물건이 도착하기전 두세배로 오를 때여서 달러낙찰은 곧 떼돈을 버는 길이었고 이때 큰돈을 번 대구 섬유업자들도 많다. 대구지방에는 이때 화섬시대가 서서히 열리고 있었는데 염색가공시설이 전무해 경북직물조합이 경북염공이라는 염색공장설립에 나섰다.
염색기계는 부산 부두까지 들여왔으나 통관할 관세 및 공장건설 자금이 부족했다. 궁리 끝에 달러를 배정받아 업체에 배정하고 수수료를 받아 해결하기로 계획을 세웠으나 상공부가 반대했다. 이에 재무장관과 직접 절충, 60만달러를 따냈다. 계약금만 내고 달러로 원료를 수입한후 1년뒤에 갚기로 했으니 이때 만금과 버금가는 달러를 배정받은 대구 직물업자들은 한밑천 톡톡히 잡은 셈. 이 달러 배정사건을 두고 수사기관에서는 배정에 의혹여부를 수사했으나 유야무야되고 이후 「5월 불론사건」으로 기록에 남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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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전 중학교 다닐때 반에 양주장집 아들이 나이롱 양말을 신고 항시
뽐내든 생각이나고 백화점의 쇼윈도우에 나이롱 양말이 부러뭄의 대상이였다.
하기야 그 당시 면 양말을 신었는데 어찌나 구멍이 잘도 나든지 어머님께 민망하기
까지도 했으나 어머님은 구멍난 양말에 전기다마를 집어넣고 깜쪽같이 짝집기 하듯
잘도 수선해 주셨고 얼마지나 나이롱이 흔해지자 명절에나 선물로 얻어 신었었다.
그후 나이롱 선풍이 부러 너두 나두 나이롱 양말을 신기 시작했다. 지금은 탄력 있고
위생적(衛生的)인 면양말로 다시 돌아 왔지만, 당시의 ‘나이롱 양말’은 내구성(耐久性)만
좋았을 뿐 건강과는 거리가 멀어 무좀이 생기곤 했었다. 정말 호랑이 담배 피든 시절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