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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형 베어링 업체를 운영하는 경일엠티에스 박일근씨(57)는 요즘 들어 얼굴색이 안 좋다. 박씨는 서울 종로구 관수동 ‘베어링 골목’의 터줏대감이다. 30년간 청계천에서 베어링 하나로 생계를 꾸려왔다. 이 골목에서는 박씨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그러나 최근 국회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안이 가결된 뒤 근심이 커졌다.

25일 청계천에서 만난 박씨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박씨는 “한·미 FTA가 발효되면 다국적 구매대행 업체들이 한국에 속속 진출할 것”이라며 “국내 베어링 판매 업체는 도저히 경쟁상대가 안된다”고 말했다.

그는 1979년 베어링 사업에 뛰어들었다. 베어링은 각종 기계에 들어가는 필수품이기 때문에 ‘기계산업의 쌀’로 불린다. 베어링은 산업화의 물결을 타고 한때 노다지로 불렸다. 박씨도 각 기업에 맞는 부품을 대주는 데 보람을 느꼈다. 밤낮없이 일하던 그는 1983년 직접 사업체를 차렸다. 4~5년 뒤엔 돈벌이가 제법 됐다고 한다. 직원도 6~7명을 새로 뽑았다. 당시 돈으로 매달 300만~400만원은 집에 가져갔다. 사업이 항상 잘되는 법은 없다. 첫 위기는 국내 대기업의 시장 잠식에서 비롯됐다. 2008년쯤 대기업의 소모성자재구매대행(MRO) 업체의 공세가 시작됐다. 삼성 IMK, LG 서브원, 포스코 앤투비 같은 대기업들이 베어링을 구매 목록에 포함시킨 것이다.

박씨는 “매출이 줄어 이상하다 했는데 알고 보니 대기업들이 우리 고객들을 쓸어담았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매출이 30~40% 줄자 견디다 못해 직원의 절반을 내보냈다. 평소 자식같이 아끼던 직원들이었지만 더 이상 버틸 재간이 없었다. 박씨는 “당시엔 아무런 준비 없이 당했다”고 했다.

최근 대·중소기업 동반성장 분위기가 확산되면서 대기업의 횡포에 제동이 걸렸다. 이달 초 동반성장위원회가 자재구매대행 대기업들의 영업범위를 제한했다. 대기업 등쌀에 위기를 느꼈던 박씨는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더 큰 ‘쓰나미’가 앞을 가로막을 줄은 몰랐다. 처음엔 한·미 FTA가 자신의 영업망에 영향을 준다는 것은 생각도 못했다. 그러나 우려는 현실이 됐다. FTA가 발효되면 외국계 자재구매대행 기업의 국내 진출을 막아온 빗장이 풀리게 된다. 직원 수가 2~3명에 불과한 국내 1600여개 중소 베어링 업체는 줄도산 위기에 몰릴 수 있다.

박씨는 “해외에서 이미 이름이 난 구매대행 업체인 미국의 그레인저, 일본의 스미토모그룹이 호시탐탐 한국 시장을 노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대기업들이 베어링 시장에 진출했을 때 거대 자본의 위력을 맛봤다”면서 “덩치 큰 미국 기업들은 더 빠른 속도로 시장을 잠식해 들어올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요즘 FTA의 핫이슈가 된 투자자-국가소송제(ISD)도 남의 일이 아니다. 박씨는 평소 베어링에만 관심이 있던 자신에게 소송제라는 낯선 단어가 괴물처럼 다가올 줄은 몰랐다고 했다. 외국 투자자들 앞에 정부의 동반성장 가이드라인은 언제든지 무력화될 수 있다.

박씨는 “지금까지 대기업들을 설득한 뒤 중소업체들의 영역을 확보해온 노력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생각에 눈앞이 캄캄하다”고 말했다.

박씨는 “투자자-국가소송제는 강한 자만 살아남으라는 제도”라며 “시장 논리만 따지다가는 중소 상인들은 몰락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박씨는 청계천 골목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작은 상점들엔 베어링 박스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제법 큰 장비로 베어링을 만드는 ‘장인’도 보였다. 하지만 60여개의 영업장은 대부분 1인기업이다. 갈수록 쪼그라들고 있는 베어링 업계의 현실을 금세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국내 대기업이 한 차례 휩쓸고 지나간 결과”라며 “한·미 FTA는 이 골목 전체를 없애버릴 수도 있다”고 말했다. 국내 대기업이 노려온 시장을 다국적 유통업체가 대신 공략할 경우 당해낼 재간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베어링 판매뿐 아니라 모든 공구나 자재구매대행 업체에 해당되는 얘기라 더 걱정스럽다고 했다.

박씨는 “베어링 판매 시장규모는 한 해 3조원 정도로 작지만 전체 자재구매대행 업계의 시장규모는 28조원에 이른다”며 “미국 대기업이 이 시장을 그냥 둘 리 있겠느냐”고 말했다.

박씨는 직원 3명을 두고 있지만 이들과 함께 장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 그렇다고 직원들이 베어링 외에 따로 배운 기술은 없다고 했다.

그는 “영세상인들도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정부가 도와주지 않으면 살길이 막막하다”고 밝혔다.

베어링판매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는 박씨는 1600개 회원사와 공동 브랜드를 만들고 지역별 연합체를 구성한 뒤 덩치를 키우기 위해 노력 중이다.

박씨는 “스물아홉 된 아들 녀석이 이 일을 가업으로 이어주길 바라지만 아들은 대기업 취업 타령만 하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다른 나라처럼 천직에 대한 자부심이 대를 이어 지속될 수 없는 현실이 가슴 아프다”면서도 “나도 아들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 일의 비전이 없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들어 날씨가 제법 풀렸지만 청계천 골목엔 칼바람이 여전했다. 박씨는 허탈한 표정을 지었다.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일하면 뭐합니까. 30년간 이 일 하나에만 매진했는데…. 예전에는 열심히만 하면 사업을 키울 수 있겠구나 하는 꿈을 갖고 살았거든요. 요즘 희망이라곤 없이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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