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는 '이순재'같은 늙은이를 요구한다

by 허승현 posted Jul 2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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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립의 잡기노트<247>관계에 달관한 듯 너그러운 노객은 인격자다. 사람의 경험은 죽을 때까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순간순간 유혹하는 과거의 영향에서 벗어나 거듭나려면 각고의 노력을 해야 한다.

순자의 성악설을 믿으며 자신을 다스린 결실이 노옹의 포용력이다. 선함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 결과이려니, 수양에 힘쓴 경지일 수 있다. 나잇값을 못하면 미운털이 박히거나 망신살이 뻗치게 마련이다.

배우 이순재(76)의 존재는 고령화 사회의 바람직한 보기다.

드라마 ‘하이킥’ 시리즈에서 그가 연기한 캐릭터는 시대 변화에 따른 노인의 롤 모델 제시다. 근엄한 노인에게 존경을 바치라는 압력을 행사하지 않는다. 극중 이수나가 그랬듯 “영감탱이”라고 불러도 될 듯한 유쾌한 늙은이다.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에서도 마찬가지다. 욕심이 많고 주책없는 면도 있지만, ‘하이킥’의 연장선에 있는 노인상을 보여줬다.

먹고 살 만한 재정상태이건만 우유대리점을 운영하고 새벽에 우유를 손수 배달하는 활기찬 노인네다. 이런 활력 덕분에 늘그막에 또 하나의 사랑을 만나는 행복을 찾는다. 뿐만 아니다. 상처 후 홀로 살면서도 아들 내외와 사이가 좋다. 어린 손녀와도 소통이 가능한 두루 튼튼한 늙으신네다.

겉으로야 눈을 부라린 채 욕을 해대지만, 자신을 둘러싼 세상과 대화하고 화합할 줄 아는 세계관을 지녔다. 죽은 아내를 향한 절개는 지키면서 외로운 할머니에게 조심스럽게 한발씩 다가간다. 말년의 고독이라는 문제를 스스로 감당하고 해결하는 성숙함을 드러낸다.

새 출발은 사랑에 한정되지 않는다. 우정도 새롭게 시작한다. 이러한 정정함이 세상을 유지한다. 불치병에 걸린 노파 김수미의 남편 송재호의 슬픈 죽음을 이순재는 보살핀다.

둘이었다가 가족이 됐다가 자식이 떠나가자 다시 둘이 된 노부부에게 치매와 암이라는 불가항력 죽음의 기운이 드리워진다. 비운에 맞선 그들은 자식에게 끼칠 폐를 걱정하고 인간의 존엄을 잃지 않고자 동반자살을 택한다.

이순재는 친구가 떠난 후의 행복한 세상을 위해 격한 감정을 조절한다. 노부부의 자살을 연탄가스 사고사로 마무리한다. 자기 역시 적멸이 멀지 않은 이순재가 문 틈을 막은 테이프를 뜯어낸다. 호상이라는 자녀들의 자위를 휩뜬 눈으로, 그러나 이성을 잃지 않은 분노로 매조지한다. 친구의 죽음 뒤에 남겨진 세상을 이순재는 그렇게 수호해낸다.

인간은 노화와 죽음을 피할 수 없다. 모두가 당면할 문제를 건강하게 매듭짓는 것이 삶의 당위다. 물론, 슬프고 곡절도 많다. 귀신도 손들고 가는 고통이 따르는 것이 질병이다. 그 공포는 논하기조차 송구스럽다.

혈연에서 자유로운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내리사랑은 무대가성이라지만, 그 사랑을 사이에 두고 부채감을 느끼지 않는 부모와 자녀는 드물다. 심리학은 상대에게 죄의식, 빚을 졌다는 마음이 없는 인간관계를 가장 이상적으로 친다. 물리적 약자인 노인의 건강한 정신이 세상을 지탱하는 기둥일 수 있는 이유다.

이순재처럼 강녕한 노인상이 필요하다. 친구가 생사를 맡길만큼 신뢰와 신의의 내공을 쌓은 참으로 멋진 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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