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빴던 117일' 금호타이어 파업에서 합의까지

by 인선호 posted Sep 05,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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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한 줄다리기 끝에 5일 극적으로 타결된 금호타이어 노사 교섭은 임금과 노무비 경감을 빌미로 노사간 힘겨루기 양상으로 번지면서 시종 긴장감 속에 벼랑 끝 협상이 이어졌다.

무노동 무임금을 포함한 6대 요구안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는 사측에 맞서 노조측은 파업과 태업으로 응수했고, 이에 사측은 직장폐쇄와 정리해고 카드로 노조 교섭단을 압박했다.

급기야 미동도 없이 정리해고 수순을 밟아오던 사측이 교섭도중 생산직 근로자 690명에게 정리해고 예고통보를 기습적으로 통보하자 발끈한 노조측은 전면파업과 공장점거로 맞섰고 다시 사측은 2차 직장폐쇄로 배수의 진을 쳤다.

잠정 합의안이 도출되기까지는 117일. 협상은 피말리는 신경전의 연속이었다.

노사가 처음 얼굴을 맞댄 것은 지난 5월11일. "잘해 보자"며 악수를 나눈 양측 교섭위원 14명은 이후 6월10일까지 6차례 릴레이 협상을 가졌으나, 의견차가 워낙 커 교섭은 번번히 무산됐다.

노조측은 거듭된 협상에서 임금 7.48% 인상을 비롯해 2008년 추가 성과금, 감산에 따른 실질임금 하락분과 무노동 무임금 보전, 설비투자 이행과 국내 공장 경쟁력 확보방안 제시 등을 요구했다.

이에 사측은 경영난 등을 이유로 노조요구를 전면 거부한 채 임금동결과 정기승호 보류, 성과금 지급 불가, 정원 재설정과 여력 인원 전환 배치 등 6개항이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경우 광주와 곡성공장의 규모를 70%로 줄이고, 706명을 정리하겠다며 강경 드라이브를 고수했다.

결국 노조측은 교섭에 진전이 없자 6월10일 쟁의행위 찬반투표를 통해 81.33%의 가결로 파업의 신호탄을 날렸다. 같은 달 29일 대의원 이상 간부파업을 시작으로 7월1일 조별 4시간 부분파업, 7월2일 8시간 근무 조업량 70% 생산태업 등 파업수위를 나날이 높여가며 사측을 압박했다. 15일에는 생산량을 50%까지 낮췄다.

사측도 "여기서 물러나면 끝장"이라며 이틀 후 정리해고 합의 요청서 통보를 필두로 구조조정 수순을 밝기 시작했다. 그러자 노조는 24일 총파업 출정식을 갖고, 사측과의 일전을 안팎에 알리며 조합원들을 조직화했다.

그러나 이후 3주동안 교섭은 제자리에 머물렀고 그 사이 생산량을 40%까지 낮춘 노조에 맞서 사측은 노동청에 정리해고 신청서를 제출한데 이어 지난달 23일에는 '살생부'나 다름없는 정리해고 명단을 노조측에 통보하며 구조조정 의지를 재확인했다.

분개한 노조는 즉각 8시간 전면파업을 강행했고, 사측은 기다렸다는 듯 94년 공장점거 사태 이후 15년만에 처음으로 직장폐쇄를 단행했다.

직장폐쇄에 대해 사측이 "지난해 11월부터 국내 공장 주문이 끊겼고, 8개월째 생산량도 70% 수준에 머무는 등 경영난이 극에 달하고, 상반기 영업적자와 당기순적자도 1042억 원과 2223억 원에 달해 고강도 구조조정을 하지않으면 영원히 도태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금융위기와 그룹 경영진의 내분 등 회사 안팎의 악재에다 예상 밖으로 공격적인 사측의 태도, 노사 갈등을 바라보는 곱잖은 시선 등을 의식해 노조는 협상 개시 후 처음으로 양보안을 제시한 것도 이 무렵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사측은 무노동 무임금 수용 등 추가 양보안을 요구하며, 되레 2차 명예퇴직 접수에 이어 노조 간부 21명을 검찰에 고소하는 등 '노조 옥죄기'에 사실상 올인했다.

노조 집행부 선거 이튿날인 지난 4일 열린 '끝장 교섭' 도중에는 정리해고 대상자 690명의 명단을 당사자 휴대전화로 일괄발송해 노조를 적잖이 당황케했다. 노조는 즉각 전면파업에 나섰고 회사는 5일 새벽 2차 직장폐쇄를 감행하면서 파국으로 치닫는 것 아니냐는 우려감이 증폭됐다.

가능한 카드를 모두 꺼내든 채 진행된 117일간의 지리한 공방은 노사가 5일 오후 "공명과 파국만은 막자"며 전향적인 양보안을 상호 제시하면서 마침내 자율 타결로 막을 내리게 됐고, 우려했던 정리해고도 사실상 백지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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