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6일 오전 9시쯤 백모씨는 여자친구 이혜진(가명·27)씨로부터 다급한 목소리의 전화를 받았다. 이씨는 성추행을 당했다며 울먹였다. 이씨가 있던 곳은 경기도 안산의 한 사우나 여탕 수면실. 그곳에 한 남성이 몰래 들어와 자신의 허벅지를 만졌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백씨는 여자친구와의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사우나에 연락했다. 그는 사우나 측에 “빨리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으나 사우나 직원은 “보고를 먼저 해야 한다”며 버텼다. 결국 30분이 지난 뒤 백씨가 직접 경찰에 신고를 했지만 이미 성추행범은 도망가고 난 뒤였다.
이후에도 백씨에게 답답한 상황은 계속 이어졌다. 무엇보다 백씨는 어떻게 성추행범이 사우나 여탕에 들어올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 사우나 측은 “직원도 모르는 계단 쪽 비상구로 들어왔다”고만 답변했다.
사후 처방도 엉망이었다. 경찰은 1층 CCTV에 찍힌 용의자 사진을 여탕이나 손님들이 잘 볼 수 있는 쪽에 부착, 조심하라고 일렀다. 그러나 일주일 뒤 사우나를 다시 찾은 백씨는 어디에서도 사진을 찾을 수 없었다. 백씨는 사우나 측 담당자에 이를 물었으나 “사우나 이미지도 있고 영업 방해가 돼 사진을 붙일 수 없다”며 “카운터 뒤편 직원들이 볼 수 있는 곳에 부착해 직원들에게 주의하도록 일렀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백씨는 “여자친구가 엄마를 보고도 놀라서 울고 집 밖 발자국 소리만 나도 기겁한다”며 “10월 7일 큰 병원에서 심리 검사를 받기로 했다”고 말했다. 실제 이씨가 지난 19일 한 정신과의원에서 받은 진료의뢰서엔 “적응 장애, 급성 스트레스 반응의 문제로 심리 검사 등이 필요하다”고 써 있었다.
그는 “범인을 못 잡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야 또 이런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 더 조심할 수 있는데 사우나 측이 은폐하려고만 한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와 관련, 사우나 측은 “사건이 발생한지 첫 3일간은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놨다”며 “그러나 그걸 용의자가 보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뗐다. 우리는 그 용의자를 잡는 게 우선”이라고 해명했다. 또 신고가 늦은 것에 대해 “현재 시스템 상에서는 직원들이 신고하기 전에 무조건 위에 보고를 하게 돼 있다”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