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첫 신경전
"이런 식이면 점심 먹고 짐 싸서 돌아가야 될지도 모르겠다"
방북 첫날, 영접행사에서 12분 간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조우한 것 외에는 주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지낸 노 대통령은 김 상임위원장과의 면담 과정에서 이렇게 한 번 밀어붙였다.
김 상임위원장 역시 50여 분 동안 자기 이야기를 쏟아내며 한치도 물러서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탐색전이라고 보기엔 양측의 신경전이 1시간 40분 동안 치열하게 진행된 이 첫 만남에 대해 청와대 천호선 대변인은 '회담이 아니라 면담'이라고 규정하며 크게 무게를 싣지 않으려 애썼다. 김정일 위원장이 직접 빨리 나서라는 신호였던 셈이다.
또한 방북 전 수차례 걸쳐 "최소한 양 정상이 2000년 정상회담 수준의 시간 만큼 함께 할 것"이라고 공언해 놓은 것도 신경 쓰였을 터.
애초에 공식수행원, 특별수행원, 일반수행원과 함께 받은 초대장에 나온 주빈은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평양시인민위원회 박관오 위원장이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이날 저녁 목란관 환영 만찬 자리에 나타난 것은 '역시나' 김영남 상임위원장이었다.
두 시간 20 여 분 동안 진행된 만찬 내내 노 대통령이 김 상임위원장에게 손짓을 섞어가며 뭔가를 열정적으로 설명하는 모습도 심상찮아 보였다.
예민해진 탓인지, 만찬 후반부 노 대통령이 그 자리에 없는 김정일 위원장까지 거명해가며 "신명난 김에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김영남 상임위원장, 두분의 건강을 위해 건배를 합시다"라고 건배를 제의하는 모습에서도 무슨 신호가 담긴 것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2. "벽을 느꼈다"
이 같은 신경전은 다음날에도 이어졌다. 이날 오전 김정일 위원장과 두 시간여 동안의 1차 정상회담이 끝난 후 사실상 브리핑에 나선 것은 다름 아닌 노 대통령이었다.
노 대통령은 남측 인사들만 참가한 옥류관 오찬 자리에서 오전 회담의 내용을 비교적 소상하게 전했다. 하지만 15분 간 진행된 발언 가운데 기자의 귓속을 파고든 말은 "쉽지 않은 벽을 느꼈다"는 한 문장이었다.
시간이 흐른 뒤, '별로였다'는 평가가 흘러나온 적은 있어도 회담 진행 중 대통령이 이런 식으로 평가하는 건 외교 관례와 동떨어진 것. 우리 정부 관계자는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보내는 최후의 메시지"라고 평가했다.
오후 정상회담이 재개된 직후 평양 고려호텔에 설치된 프레스센터로 들어온 소식은 김 위원장이 노 대통령에게 '하루 더 평양에 머무르라'는 깜짝 제안을 했다는 것. 노 대통령이 던진 회심의 강속구가 통했던 것일까?
잠잠하던 프레스센터는 벌집을 쑤신 듯 했지만 '뭔가 일이 되는 것 아니냐, 잘 안되면 이럴 일이 없지 않겠냐'는 기대도 조금씩 나오기 시작됐다.
평양 프레스센터에선 김 위원장과 노 대통령의 인사 발언을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했지만 막상 서울에서 송출된 TV 화면에선 두 사람의 발언이 또렷하게 들렸다. 웃지 못할 상황이었지만, 화면을 전송받은 서울의 방송사들이 증폭기를 통해 두 사람의 목소리를 키웠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화면에 비친 서울프레스 센터에선 윤승용 홍보수석이 마이크를 잡고 긴장된 모습으로 '북측, 체류 연장 제안' 소식을 흥분된 목소리로 연거퍼 발표하고 있었다.
#3. 대변인 브리핑으로 사실상 '게임오버'
하지만 곧 이어 △ 노 대통령은 예정대로 4일 오후 귀경 △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5일 환송오찬 마련 △남북정상 합의사항은 오찬 전까지 발표된다는 천호선 대변인의 브리핑이 전해지면서 사실상 '게임 오버'.
긴장은 일순간에 풀어졌다. 구체적 합의사항은 한 가지도 전달된 게 없었지만 당초에 들고 간 보따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리라는 예상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었다. 청와대 관계자들이나 북측 관계자들의 표정도 어둡지 않았다.
무엇이 터닝 포인트였을까? 청와대 관계자는 "양측이 처음에 솔직한 입장을 쭉 풀어낸 것이 오히려 효율적이었다"고 평가했고, 특별수행원으로 동행했던 김근식 경남대 교수는 "북측이 핵문제를 풀기로 이미 결정했고 경제적으로는 남측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큰 가닥은 이미 잡혔다고 봐도 된다"고 풀이했다.
결국 다음 날 발표된 정상선언문은 이 같은 예상을 충족시켰다. 노 대통령이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평화체제 추진에 대한 원칙적 합의도 포함되어 있었고, 뜨거운 감자였던 NLL문제는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로 정리됐다.
남포 조선협력단지, 국방장관회담 같은 구체적 사안도 포함됐다. 다만 납북자, 국군포로 문제가 빠진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합의문 발표 소식을 보도하던 TV 화면에선 방송사의 오디오 실수로 "이 정도면 다음 정권에 부담을 안 주겠는 걸"이라는 서울 프레스센터 현장 기자의 목소리가 끼어들기도 했다. 정부 관계자 입장에선 싫지 않은 방송사고 였다.
#4. 입이 귀에 걸리다
정상선언 발표 직후 벌어진 김정일 위원장의 답례 만찬이 하염없이 길어지고, 와인이 몇 순배 계속 돌았다. 입이 귀에 걸린 노 대통령은 개성 공단에서, 남측 출입관리소(CIQ) 앞에서 진행된 대국민보고회 자리에서 무엇부터 자랑해야 될지 모를 정도였다.
밤 9시가 너머 시작된 대국민보고회 자리에서 노 대통령은 "여러분 식사도 못 하시고 기다리게 해서 죄송하다"고 양해를 구하면서도, 쌀쌀한 날씨 속에서 기다린 실향민과 지지자, 정부 관계자들 앞에서 "보따리가 모자랄 정도로 성과물을 들고 왔다"면서 특유의 달변을 41분 간 쏟아냈다.
빡빡한 일정에 시달린채 단상 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각계 특별수행원들의 표정을 보며 과유불급이 아닌가도 싶었다.
하지만 '자랑하고도 싶겠다'는 마음도 들었다. "그 동안 훌륭한 남북합의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다"는 노 대통령 자신의 평가에서 이번 합의는 예외로 남을 수 있느냐가 남은 문제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