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색 다르고 한국말 못해도 “나는 꼬레안”

by 운영자 posted Aug 1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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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일 오후 쿠바의 수도 아바나 도심에서 자동차를 타고 서쪽으로 달렸다.

30분후 쯤 도착한 곳은 아바나 교외에 있는 한인 4세 빠뜨리샤 임(39·주부)씨의 집. 허름한 단독주택 외벽 색깔이 바래져 있고 곳곳의 칠이 벗겨져 있었다. 집 안으로 들어가자 임씨와 어머니 크리스티나 장 김(79)씨가 반갑게 기자를 맞이했다. 천장에는 낡은 선풍기가 ‘덜그럭’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찌든 때 묻은 냉장고, 라디오 등 수십년 된 가전제품들은 제대로 작동할지 궁금했다. 창 밖에는 폐차 한 대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피부색 달라진 애니깽 후손들

임씨는 한인 4세지만 얼굴에는 아직 한국인의 모습이 많이 남아 있었다.

검정 눈동자, 옆으로 찢어진 눈은 영락없는 한국사람이었다. 그는 “비록 한국말은 전혀 못하지만 나는 스스로 ‘꼬레안’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임씨는 1905년 제물포항을 떠나 멕시코 애니깽 농장에 정착한 1033명의 한인들 가운데 한 명의 후손이다. 멕시코에서 살던 그의 할아버지는 1921년 쿠바로 건너왔다.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쿠바행 배를 탔다. 그러나 쿠바에서 설탕 가격이 폭락하면서 할아버지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던 애니깽 농장에서 일을 했다.

한인 5세인 에르디(21·학생)씨. 할아버지는 멕시코 마야인과 결혼했고, 아버지는 쿠바인과 결혼했다. 여러 인종의 피가 많이 섞인 에르디씨는 언뜻 보면 틀림없는 남미인이다. 피부가 검고, 눈이 크고, 머리도 곱슬이다. 물론 한국말을 못한다. 에르디씨는 “내 몸에 한국인의 피가 일부 흐르고는 있지만 나는 당연히 쿠바 사람”이라고 말했다.

애니깽의 후손들은 세월이 흐를 수록 ‘한국인의 DNA’를 잃어가고 있다. 외모뿐 아니라 생각, 문화, 관습, 언어도 엄밀히 따지면 90% 이상 남미인이 돼버렸다. 한국인의 후손임을 잃지 않으려고 1921년 쿠바 한인지방회를 만들어 한글을 가르치고 한국역사 교육도 했다. 하지만 돈이 없어 명맥이 사실상 끊겼고, 현재 한국말을 하는 애니깽 후손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애니깽 후손의 실태

현재 쿠바에는 800여명의 애니깽 후손들이 아바나, 마탄사스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대부분은 농사일을 하거나 작은 공장에서 일한다. 의사, 교사, 자동차 엔지니어 같은 전문직에 진출한 후손들도 더러 있지만, 이들도 풍요롭게 살지는 못하고 있다. 멕시코에 살고 있는 2만~3만명의 후손들도 사정이 비슷하다. 멕시코 유카탄주에서 대형 매연 검사소를 운영하며 한인 후손회장을 맡고 있는 한인 3세 율리세스 박(68)씨 같은 부자는 극소수이고, 대부분 노동자로 일하면서 가난하게 살고 있다.


◆모국 그리워하는 후손들

애니깽 후손들 중에는 지구 반대편에 있는 조상의 땅을 그리워하는 젊은이들도 적지 않다. 일제시대 쿠바의 애니깽들은 쌀 한 숟가락씩 모아 독립자금을 마련해 임시정부에 보냈다.

지금도 쿠바의 한인은 매년 3월 1일이 되면 함께 모여 한국음식을 만들어 나눠 먹는다. 한인 5세인 넬슨(21)씨는 “비록 한글은 모르지만 김치, 장조림과 같은 단어는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애니깽

애니깽(Henequen)은 건조한 기후에서 자라는 용설란(龍舌蘭)의 일종으로 키가 1~2m 정도다. 잎의 껍질을 벗겨낼 때 나오는 강한 섬유질로 선박용 밧줄을 만든다. 일제때인 1905년 4월 4일 1033명(남자 802명, 어린이 포함 부녀자 231명)의 한인들은 멕시코에 가면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내용의 황성신문의 모집광고를 보고 배를 타고 멕시코에 가서 애니깽 농장에서 일했다. 이후 우리나라에선 이들을 ‘애니깽’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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