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UN사무총장..고3 때 케네디 만난 뒤 외교관 꿈

by 인선호 posted Oct 04,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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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여름 충주고 3학년생 반기문은 미국 워싱턴DC의 백악관에서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을 만났다. 옆에는 각국 대표인 수십 명의 또래 학생이 있었다.

네 명의 한국 대표 중 한 명인 꺽다리 반기문에게 케네디 대통령은 "장래 희망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그는 "외교관이 되겠다"고 당차게 대답했다. 44년 뒤 그는 세계 최고 외교관의 지위를 눈앞에 두고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얘기하는 게 있다. 성실.친절.외유내강하다는 것이다. 윗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으로 그의 성공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바탕에는 실력과 성공에 대한 집념이 도사리고 있다고 평가한다.

44년 충북 음성에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충주로 이사해 고교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3남2녀 중 장남으로 부친은 정미소 종업원이었다. 밥 굶을 일은 없었지만 가난했다. 그래도 공부는 늘 1등이었다.

그의 초등학교 동창인 한승수 충주 교현초등학교 교장은 "공부밖에 모르는 아이였다. 친구들에게 늘 문제 풀기나 외우기 시합을 하자고 했다"고 기억했다.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은 고교 1학년 때 찾아왔다. 집 근처에 화학비료 공장이 들어서고 외국인 기술자들이 몰려온 것이었다.

초등학교 때 변영태 당시 외무부 장관의 교내 강연을 듣고 외교관이 되겠다고 결심했던 그였다. 시간만 나면 공장 근처를 배회하다 외국인에게 영어로 말을 걸었다. 나이 차가 꽤 났지만 친구 사이가 됐다. 영어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향상됐고, 고교 3년 때 적십자사 주최의 영어 웅변대회에 나가 입상했다.

그 결과가 케네디 대통령과의 만남이다. 영어는 고비마다 그의 힘이 됐다. 군 복무 중에는 4성 장군의 영어 개인교사로 차출됐고, 외교관이 된 뒤에는 줄곧 한국 외교의 핵심인 영어권 업무를 맡았다.

외교관으로서 그의 능력을 제대로 인정해 준 사람은 노신영 전 국무총리였다. 72년 인도 뉴델리 총영사였던 노 전 총리는 반기문 부영사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근면.성실한 데다 윗사람이 원하는 것을 미리 정확히 파악해 처리하는 능력이 눈에 쏙 들어왔던 것이다. 반 장관은 특별한 취미가 없다. "일하는 것 자체가 체력 관리 비법"이라고 말한다. 젊은 시절엔 좀처럼 휴가도 안 갔다. 한마디로 워커홀릭(workaholic.일벌레)이다.

74년 인도대사 시절 노 전 총리는 "대사관 일은 반기문만 있으면 된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노 전 총리는 85년 국무총리가 되자 옛 부하를 총리 의전비서관 자리에 앉혔다. 노 전 총리와의 깊은 인연은 공직 생활의 든든한 배경이 됐을 뿐 아니라 비서관.보좌관으로 이어지는 참모 경력의 출발이었다.

그는 외교부 장관 특별보좌관(92년), 대통령 의전수석 비서관(96년),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2001년), 대통령 외교보좌관(2003년)을 거쳤다. 반 장관은 종종 "윗사람의 장점을 내 것으로 만들려 했다"며 "노 전 총리로부터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엽서나 편지를 보내는 것과 책상 정돈하는 습관을 배웠다"고 말한다. 보스의 스타일을 스스로 닮아가는 특급 참모의 면모를 갖춘 것이다.

그의 대학(서울대 외교학과) 동창인 안청시 서울대 정치학과 교수는 "반 장관은 대학 때 늘 입주 과외를 해 학비를 마련했는데 입주한 집 어른들의 칭찬이 자자해 유명 사업가들이 서로 그를 데려가려 했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실력이 뛰어난 데다 겸손하고 신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늘 웃는다. 소리 지르거나 화내는 걸 봤다는 사람이 없다. 부하 직원들에게 출입문을 열어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한다. "내가 일찍 오면 직원들이 다 일찍 출근하게 된다"는 이유로 반드시 정시에 출근한다.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몸에 배어 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모친 신현순(85)씨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가족들은 말한다. 절대 다른 사람과 다투지 말고 덕을 베풀고 살라는 말을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고 한다. 충주에 살고 있는 모친은 3일 아침 아들과의 통화에서 "세계적으로 훌륭한 아들을 둬서 자랑스럽다"면서도 "매사에 겸손히 임하라"고 당부했다.

이렇게 부드럽고 겸손하지만 일을 대할 때는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치밀하고 엄격하다. 97년 대통령 외교안보수석 비서관으로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가 망명했을 때는 세밀하고 잡음없는 업무처리로 국제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는 부하 직원들에게 늘 대안 제시를 요구한다. 사전 준비 없이 보고한 직원들이 당황하는 일이 자주 벌어진다. 그래서 '부드럽지만 안으로는 강하고 강하다'는 의미로 '외유내강강'형으로 불린다.

외교부 내에서 그는 '특기'로 통한다. '특별한 기수가 없다'는 뜻이다. 상사와 부하 모두로부터의 신망이 그만큼 두텁다는 얘기다. 오랜 직업외교관 생활을 거치면서 그에게는 보수적 성향이 몸에 배어 있다. 발탁보다는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인사 스타일에서도 그런 기질이 잘 드러난다.

2001년 그는 외교부 차관에서 유엔총회의장 비서실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유엔과의 친분을 쌓는 계기로 활용해 결국 사무총장으로 선출되는 발판으로 삼았다.

고교 때 학생회장단 모임에서 만난 여고생(유순택씨)에게 끊임없는 구애를 펼쳐 결혼에 성공했다. 지난해에는 62년 미국 방문 때 머물었던 민박집 주인을 초청해 43년 만에 만났다. 한번 마음먹은 일은 반드시 이뤄내고야 마는 집념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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