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전체가 월드컵과 지방선거 열기에 푹 빠져 있던 지난달 31일 오전 11시. 서울 광화문 사거리 교보빌딩 앞에 검은색 티셔츠를 입은 20대 젊은이 40여명이 모여들었다. 금발의 외국인도 섞여 있었다. 영어 연설이 시작됐다. 동시 통역이 붙었다.
“얼마나 많은 생명이 죽은 후에 관심을 보이시렵니까. 북한의 배고픈 아이들은 정치를 모릅니다. 북한의 인권에 관심을 가져 주십시오.”
화사한 나들이 옷을 입은 사람들은 무심하게 지나갔다. 행인들에게 나누어 준 전단지는 곳곳에 뒹굴었다. 구호를 외치던 젊은이들이 길바닥에 쓰러졌다. 시체처럼 드러누웠다. 참혹한 인권 유린의 현장, 북한 주민들의 고통을 알리는 퍼포먼스다. 그제야 신기한 듯 발길을 잠시 멈춘 사람들은 누워 있는 젊은이들을 빤히 바라 보았다.
“한국 사람들이 북한의 인권 상황에 대해 너무 무관심하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어요. 같은 핏줄이고 매일 통일을 외치면서 왜 북한 인권에는 침묵하죠? 미국이나 일본 사람들도 이보다 10배는 더 북한 인권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어요.”
광화문 한복판에 드러누운 시위대는 해외의 북한 인권단체 ‘링크(LiNK:Liberty in North Korea)’ 회원들. 링크의 회장을 맡고 있는 재미교포 2세 애드리안 홍(25)씨가 안타까운 심정을 털어놓았다. 미국 예일대를 졸업한 홍씨는 대학 3학년 때 북한 인권 상황의 심각성을 알게 된 뒤 링크에 가입해 활동하고 있다.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링크는 2004년 3월 예일대 재미교포 2세 대학생들이 주축이 돼 결성한 비정부기구. 미국 국내외 73개 지부에서 8000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은 전세계 각지에서 북한의 인권 실태를 고발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선전활동을 하고, 지난해엔 중국에서 탈북자 실태 조사를 벌였다.
한국을 찾아 온 링크 회원들은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생들도 있고, 남부럽지 않은 직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다. 워싱턴DC에서 IT컨설팅 회사에 다니고 있는 토미 표(23)씨는 “이번에 한국에 오려고 휴가를 신청했더니 회사에서 처음에는 안 된다고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정 그러면 내가 회사를 관두는 수밖에 없다’며 엄포를 놓았더니 결국 회사에서 승낙을 하더라”고 말했다. 그는 “직장은 그만두고 다른 곳을 구하면 되지만 북한 인권의 참상을 알리고 개선하는 일은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말했다.
호주에서 온 쟈스민 바렛(여·22)씨는 자비로 한국행 비행기표를 샀다. 바렛씨는 “제가 외국인이라 그런지 서툰 한국말로 ‘북한 인권’에 대해 말하니까 한국 사람들이 도망치듯 떠나버리는 것 같아 너무 속이 상한다”고 말했다.
링크 회원들은 지난달 15일 입국 이후 17일 동안 서울시청 앞 광장, 인사동 거리, 종로 거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참혹한 북한 인권의 현실은 다른 나라에 살고 있는 교포 2세들과 외국인들인 이들에게 절박했지만 서울의 거리는 무관심했다. 그러나 이들은 물러날 생각이 없다.
미국 컬럼비아대에 재학 중인 재미교포 2세 한동아(韓東我·여·19)씨는 “그래도 첫날 집회를 할 때보다는 모여드는 사람이 조금씩 더 늘어나고 있는 걸요. 언젠가는 저희들이 길 바닥에 누워서 시위를 하지 않아도 모두가 북한의 인권에 관심을 갖게 되는 날이 올 거예요”라고 말했다.
월드컵 응원가가 시내 곳곳에서 쩌렁쩌렁 울려 퍼지던 날 링크 회원들은 이렇게 아스팔트 바닥에 끊임없이 쓰러졌다 일어나기를 반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