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말 사법시험 2차 시험을 치르는 이정호(29)씨는 요즘 남다른 고민이 있다. 독일 월드컵 경기가 주로 새벽에 열리기 때문이다.
시험을 코 앞에 두고 새벽 방송을 보다 컨디션 조절에 실패하지 않을까 걱정되지만 생중계로 보지 않으면 결과가 궁금해 스트레스가 더 쌓일 것 같다.
축구광인 이씨는 “2002년의 감동이 아직 생생하기 때문에 거리 응원까지는 아니어도 중계는 꼭 볼 생각”이라며 “남들처럼 마음 편히 즐길 수 없는 올해 월드컵 일정이 야속하다”고 말했다.
울산에서 자동차를 판매하는 최승필(34)씨는 2002년을 생각하면 지금도 몸서리쳐진다. 고객에게 자동차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다음에 만나자”며 도무지 호응이 없었다. 계약 체결 직전까지 갔던 고객도 “월드컵이 끝나면 다시 생각해 보자”며 결정을 미루기 일쑤였다.
최씨는 “2002년 월드컵 기간 중 나 뿐 아니라 회사 전체 매출액이 전년도 대비 23%나 줄어 큰 타격을 입었다”며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세일즈맨에게 월드컵 열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강력한 경쟁상대”라고 말했다.
보름 남짓 남은 독일 월드컵에 많은 이들이 설레고 있지만 월드컵 열기가 달갑지 않은 사람들도 꽤 많다. 한국이 선전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똑같아도 월드컵이 자신에게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면 문제는 다르다.
사법시험, 행정고시 등 다음달 중요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에겐 축제 같은 분위기가 고역이다. 특히 남자 수험생의 경우 더 그렇다.
월드컵이 열린 2002년 사법시험 여성합격자 비율은 23.95%로 2001년 17.46%, 2003년 20.97% 보다 유난히 높아 축구 열기와 남녀 합격률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중계방송이 새벽에 몰려 있어 생계에 직접적 영향을 걱정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동대문시장에서 의류도매업을 하는 김두진(34)씨는 “월드컵 때문에 6월 장사는 이미 접은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한숨을 쉬었다.
2002년 경험으로 볼 때 쇼핑몰 앞에 대형 멀티비전을 설치해 사람들을 모은다 해도 응원이 끝나고 나면 그냥 돌아가 버린다는 것이다.
김씨는 “새벽에 지방에서 올라오는 상인들도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라며 “손님이 없다고 가게문을 닫을 수는 없기 때문에 통로마다 1명씩 당번을 정해놓고 우리도 응원하러 광화문에 나갈 생각”이라고 말했다.
대리운전 업체들도 떨떠름한 표정이다. 주 고객인 직장인들이 새벽 방송을 보기 위해서는 일찌감치 퇴근해 눈을 붙여야 한다.
아니면 밖에서 다른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며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경기종료 시간이 동틀 무렵이라 대리운전 보다는 사우나를 찾을 가능성이 크다.
대리운전 기사 박모(28)씨는 “요즘 가뜩이나 경쟁이 심한데 손님들로 붐벼야 할 새벽 시간에 허탕만 친다면 큰 일”이라며 걱정했다.
부동산 시장에도 비상이 걸렸다. 2002년 부동산 업계가 호황기였음에도 불구하고 월드컵 열기에 묻혀 6월에 고전을 면치 못했던 기억이 있다.
공인중개사 김모(47)씨는 “요즘 부동산 거래가 워낙 부진하기 때문에 당시보다 상황이 훨씬 좋지 않다”며 “그렇다고 달리 뾰족한 대책은 없다”고 말했다. 신규 분양도 사정은 비슷하다.
부동산뱅크 길진홍 팀장은 “6월에 예정된 신규 물량은 5만여 세대로 5월과 비슷하지만 이 중 절반 정도는 월드컵 열기에 따라 7월 이후로 연기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DVDㆍ비디오 대여점, 만화방, PC방 등도 울상이다. 비디오코리아 관계자는 “가뜩이나 시장이 어려운 상황에서 6월 매출은 전월보다 30% 이상 떨어질 것으로 보인다”며 “빨리 월드컵이 끝나기 만을 바랄 뿐”이라고 말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도 내심 전전긍긍하고 있다. 2001년 320만명에 달하던 관중이 2002년 월드컵에 밀려 260만명으로 급감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KBO 관계자는 “야구와 경기시간이 겹치지 않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는다”면서도 “6월이 야구 성수기인 만큼 구단별로 마케팅을 강화하는 등 대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