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기부 불법도청 테이프에 담긴 김대중(金大中.DJ) 전 대통령의 재벌 관련 언급이 녹취록 공개 과정에서 누락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이 일고 있다.
DJ정권의 핵심 실세였던 박지원(朴智元) 전 문화관광부 장관과 천용택(千容宅) 전 국정원장이 도청 자료의 존재 사실을 인지했거나 개인적으로 활용했다는 의혹이 불거진 가운데 지난 97년 대선 당시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가 삼성의 기아차 인수 지원 의사를 언급한 대목이 누락된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이른바 X파일 파문이 새로운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27일 한겨레 신문이 녹취록 대조 결과, 97년 9월9일자 녹취록에서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에게 삼성그룹의 기아차 인수 지원 의사를 밝힌 것으로 돼 있는 인물은 이회창(李會昌) 당시 한나라당 후보가　아니라 김대중 후보로 드러났다.

김대중 후보는 기아자동차 문제와 관련해 “삼성이 갖고 있는 복안을 당당하게 밝혀 공론화하면 당 정책위에　검토시켜 가능한 한 도와줄 것”, “시중에서는 삼성이 큰 돈을 준다고 하는데 왜 돈이 없느냐”, “(기아 회장인) 김선홍이는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삼성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기 때문에　토론회 때도 삼성을 비난하지 않았다”고 발언했다는 것.

이와 관련, MBC는 “녹음테이프를 추가로 분석한 결과 안기부 내부문건과 실제 녹취내용과는 일부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삼성이 기아차 인수와 관련해 복안을 밝히면 도와줄 수 있다고 말한 사람은 당시 이회창 후보가 아닌 김대중 후보였다”고 확인했다.

MBC는 또 “이회창 후보의 경우 삼성의 기아차 인수에 힘을 써보겠다는 말을 홍석현 사장에게 한 것으로 돼 있지만 안기부 문건에는 이 내용이 빠져 있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정치권 등에선 녹취록이 외부에 유출될 때부터 DJ에 불리한 대목이 누락됐을 가능성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X파일 사건과 관련해 입을 다물고 있는 박지원, 천용택씨의 행적도 의문을 더하고 있다. 천씨는 지난 99년, 김영삼(金泳三) 정부 때 비밀 도청조직을 지휘했던 공모씨가 도청테이프를 외부로 유출한 사실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공씨 처벌 등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아 불법 사실을 눈감아준 것 아니냐는 의혹을 받고 있다.

공씨로부터 테이프를 건네받은 재미동포 박모씨와 접촉했다는 박 전 장관도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이른바 X파일 파문에 DJ정권 실세들도 연루됐다는 의혹이 불거지자 한나라당은 이번 사태가 야당을 흔들려는 불순한 의도에 의해 기획됐다는 음모론을 펴며 여권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강재섭(姜在涉) 원내대표는 “명백한 덮어씌우기”라며 “음모론적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고 말했고, 이정현(李貞鉉) 부대변인은 “DJ관련 부분을 누락시켰다는 보도는 X파일 파문이 편파공개, 정략적 공개임을 입증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공보 담당인 최경환(崔炅煥) 비서관은 “기아차 인수지원 보도는 사실무근이며 김 전 대통령께서는 법에 어긋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일축했다.

민주당 유종필(柳鍾珌) 대변인은 “알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면서 “분명한 것은 국민회의가 기아차를 삼성그룹에 유리한 방향으로 처리하는 어떠한 정책도 검토한 바가 없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DJ언급 누락 논란에 대해 공식 반응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