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평양은 무당굿 열풍

by 이규진 posted Jul 14,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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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이 집에 귀신이 들었어. 조상묘를 옮겨야 집안 일이 잘 풀리겠어. 잘 되면 아들이 장군님(김정일) 은덕으로 김일성대학에 들어갈 수 있어.…”
제단 위에 칼이 꽂혀 있고 돼지 머리 앞에는 향이 타오르는 가운데 한 여자 무당이 굿을 하면서 내뱉는 소리다. 이는 최근 평양에서, 그것도 내로라 하는 고위 간부 집에서 벌어지는 무당굿의 한 장면이다. 점쟁이들이 등장해 주민들의 사주팔자를 봐주는 일은 1990년대 중반이후 널리 만연됐으나 무당과 굿이 성행하는 것은 전에 없는 새로운 풍경이다.

무역 업무차 잠시 중국에 나왔다는 평양 주민 허만식(가명)씨는 “1990년대 후반 하나 둘씩 생겨나던 점집과 무당이 이젠 평양 한 복판에서 버젓이 활동하는 데까지 이르렀다”면서 “요즘 웬만한 간부 집에서 몰래 무당굿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비밀도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무당이나 굿판은 비사회주의적 현상으로 명백히 불법이고, 적발되면 무당은 물론 무당을 불러 굿판을 벌인 사람 모두 엄벌에 처해지지만 이런 일이 끊이지 않는다”고 전했다.

허씨는 “흥미로운 것은 무당이 굿을 하면서도 ‘장군님 은혜’니 ‘수령님 덕분’이니 하는 말은 빠뜨리지 않는 것”이라면서 “이는 나중에 (당국에) 걸려들더라도 형벌을 낮출 수 있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평양 출신의 한 탈북자는 과거 자신이 무당을 불러 집에서 굿판을 벌였다가 구역 보안성(경찰)에 끌려간 적이 있다면서 보안원이 “노동당시대에 당은 안 믿고 무슨 무당을 믿느냐”며 지방으로 추방하겠다고 위협했지만 뒤로 뇌물을 주고 사태를 무마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제법 용하다고 알려진 무당은 인민보안성에 체포된 뒤 지방으로 추방되어도 오래지 않아 다시 평양으로 돌아온다고 한다. 간부들이 점을 보고 굿을 하기 위해 이들을 다시 불러올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점을 잘 보면 최고 100달러의 점값을 받을 정도로 기세가 높다. 점값이 비싸도 점쟁이나 무당들의 인기는 식을 줄 몰라 최근에는 일반 주민들도 가계의 부담을 무릅쓰면서까지 점을 치고 굿을 하려 한다고 한다.

함남 함흥에서 살았던 탈북자 김영순씨는 “식량난으로 먹고살기 어려워지고 날마다 사건 사고가 빈발해 불안감이 높아지자 주민들이 너도나도 점술과 굿판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함흥은 북한에서도 큰 도시인데 ‘애기무당’ ‘정전무당’ 등 이름 있는 무당들이 간부들의 운세와 길흉을 봐주고 있으며, 인기 없는 무당들은 일반 서민들의 집에서 굿을 하고 있다고 김씨는 말했다.

장사꾼들이 먼 길을 떠나기 전에는 반드시 용한 점쟁이를 찾아가 길흉을 물어보는 것은 관례처럼 돼 버렸다고 한다.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듯 북한 당국은 여성동맹 기관지 ‘조선여성’ 최근호 (2004.3)에서 “낡은 봉건적 사상잔재를 없애는 것은 강성대국건설의 중요한 문제”라는 제목의 글에서 “조선여성들이 사주팔자나 궁합을 보면서 결혼하고 ‘손없는 날’을 골라 이사나 출장을 가는 행위 등은 봉건적 사상 잔재”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북한 당국은 무당굿을 비롯한 미신행위가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자 최근 주요 도시마다 비사회주의 그루빠(그룹)를 조직해 무당과 점쟁이들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워낙 사회 깊숙이 파고든 데다 주민들도 교묘히 단속을 피해가고 쉽게 근절되기는 어려울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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