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가 지워진 삶

by 인선호 posted Apr 1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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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지 베이자(Veja)의 논평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는 칼럼니스트 호베르또 똘레도(Roberto Toledo.사진)의 금주 제목은 “A vida após a vida”이다.

직역한다면 “생(生)뒤의 생(生)” 또는 “삶 뒤의 삶”이라고 할수 있지만 그 의미가 바로 전달되지 않는 것 같다. 차라리 “사후(死後)의 생(生)” 또는 “사후의 세계”라고 한다면 쉽게 알아들을 것 같다.

생 뒤의 생, 삶 뒤의 삶 다시말해 이승의 삶을 마친 다음 저승의 삶을 표현하는 말을 서양에서는 이 같이 삶이란 단어를 두번씩 사용해 표현하는데 비해 동양에서는 똑같은 의미를 죽음이란 단어를 넣어 표현한다.

어느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인지는 몰라도 하여튼 서양에서는 윤회라든지 다음생을 “Vida após a vida”라고 표현하고 동양에서는 사후의 세계라고 표현한다. 한 예로 “Life after Life”란 책의 한국어 번역판 제목은 “사후의 세계”로 돼 있다.

베이자에 실린 똘레도의 칼럼 “A vida após a vida”(16/04/08)를 소개한다.

D옹은 금년 95세이다. 그는 요즘 텔레비전에서 연일 방송되는 6층에서 참혹하게 내동댕이쳐 죽은 5살난 이자벨라 여아의 뉴스를 들을 때마다 경악한다. 여아 살해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속속 밝혀져서가 아니다. 그는 전날 본 뉴스를 기억하지 못하고 그날 오후에 본 텔레비전 소식을 까맣게 잊었기 때문에 저녁 뉴스가 그에게는 새롭고 놀랍다. 그래서 텔레비전이 전하는 이자벨라 여아의 끔직한 소식에 그는 매번 경악한다.    

그는 몇해 전 부인과 사별했다. 결혼한 딸과 살고 있는데 딸의 이름은 ‘루이자’인데 ‘아나’라고 부른다. 죽은 부인의 이름이 ‘아니’이다. 가족들은 D옹이 주위의 사물이나 사람의 이름을 혼동하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 딸의 이름을 마누라 이름으로 바꿔 불러도 굳이 고쳐주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위는 딸만큼 너그럽지 못한지 이렇게 불평한다. “내 부인을 장모라고 우기면 그럼 나는 뭐야?”

87세 할머니 T여사. 책상에 앉아 하루 몇 시간이고 같은 책의 같은 페이지만 읽는다. 손가락이 페이지의 어느 줄에 오랫동안 정지해 있기도 한다. 때로는 책장을 재빠르게 끝까지 넘기기도 하지만 다시 첫 장으로 돌아온다.

의자에서 일어났다가 돌아와 앉았을 때 같은 책의 같은 페이지 아니면 그 앞뒤 페이지에 손가락이 머물러 있다. 혹 책이 덮여 있으면 아무 페이지나 펴고 그 곳에 또 오랫동안 시선이나 손가락이 머문다. 그녀는 책을 읽어도 무엇을 읽었는지 기억하지 못하고 또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역시 기억하지 못한다.

점심을 먹었는데도 늘 점심식사 시간이 늦는 조카(여)가 식탁에 앉으면 숟가락을 들고 달려든다. 말리지 않으면 그녀는 하루에 몇 차례고 누가 밥을 먹기만 하면 끼어든다. T여사의 여동생이 돌보고 있는데 음식이나 바나나, 오렌지 등 과일은 보이는 곳에 절대 내놓는 일이 없이 찬장에 감추고 열쇠로 잠근다.

94세 L노인. 넘어져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요즘 휠체어 신세를 지고 있다. 가끔씩 간병인이 휠체어에 태우고 집 주위를 한 바퀴 돈다. 딸이 때로는 병원에 모시고 갈 때가 있는데 집에 돌아올 때마다 묻는다. “이집이 뉘집이냐?”.  딸이 “우리집”이라고 몇번씩 설명해도 믿기지 않는 듯 “야. 집 참 근사한데”하고 노인은 감탄한다.  

82세 할머니 H. 한 달에 한차례씩 같은 나이 또래의 친구들이 만나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옷을 만들어주는 재봉일 봉사를 하고 있다. 친구들은 그녀가 늘 정신을 놓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모임있는 전날에 전화를 해주었다.

당일에도 오후 3시라고 또 시간을 알려주었다. 한 열성회원이 30분전 마지막으로 약속시간을 그녀에게 상기시켜주었다. 모임은 정시에 시작됐고 할머니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30분이 지나자 어떻게 된 일인가 궁금해 회원들은 다시 집으로 전화했고 가정부는 그녀가 집을 나섰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 할머니는 문밖을 나와 택시 타는 것을 잊고 집 주변 동네 길을 돌기 시작했다.

왜 자기가 나왔는지를 잊은 것이다. 다리가 아프자 할머니는 집으로 들어왔다. “집으로 무사히 돌아온 것만해도 천만다행이지요”라고 가정부는 말했고 이것으로 할머니에게 모임에 참석해 달라는 동료회원들의 전화는 다시 걸려오지 않았다.    
      
21세기초반에 와 있는 오늘, 눈부신 의학의 발달로 말미암아 인간의 수명이 길어졌으며 그 부산물로 간병인 시장이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노인용 기저귀 생산공장이 배전의 가동을 하고 있다. 또 다른 부산물은 정신이 육체보다 훨씬 먼저 이별을 고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과거가 말끔히 지우개로 지워진 사람은 과거가 없다. 미래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없다. 현재만 남아있는 사람, 과거도 미래도 잃고 연약한 현재의 끈에 매달려 있는 사람, 그나마 곧 잡고 있던 연약한 끈마저 끊어지면 “나”는 사라지고 자신이 누구인지 인식하지 못하는 세계에 도달한다.  

치매, 당뇨, 파킨슨병 따위의 어려운 병을 치료하거나 완화할 수 있는 길은 현재로서는 줄기세포 연구에 희망을 걸고 있다.

그런데 브라질에서는 폐기된 배아에서 얻어진 줄기세포로 연구를 진행한다는 시기상조로 대법원의 결정에 달려있다. 지난 3월 5일 대법원 판결이 나오려고 하던 찰나 까르롤스 알베르또 디레이또 대법원 판사의 재고신청에 의해 중단됐다.

1개월이 지나자 지난주 디레이또 판사는 재고신청 연장원을 했으며 판결은 무기한 연장됐다. 금주 일수도 있고 2년 후가 될 수도 있게 됐다. 대법원판사는 가톨릭신자로 교황청의 지침을 따르는 사람이다. 가톨릭교는 인간의 생명을 위한다는 여하한 명분으로라도 배아연구에 반대하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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