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서울 동대문구에 쌀과 기부금을 몰래 놓고 사라지던 '얼굴 없는 천사'의 신원이 밝혀졌다.
주인공은 용두동의 명물인 주꾸미집의 '원조'인 '나정순 할매쭈꾸미'의 창업자 나정순 할머니(72).
매년 200만원 정도씩 10년을 몰래 기부해온 나 할머니의 정체가 밝혀진 것은 '너무 잦은 기부' 때문이라고 한다.
나 할머니는 한사코 이름 알리기를 거절했지만 돈이 조금씩 모일 때마다 참지 못하고 구청 앞에 쌀을 갖다놓는 습관 탓에 어느 새 알음알음 얼굴이 알려져 결국 직원 모두가 알게 됐다고 구는 27일 소개했다.
유년시절부터 어렵게 살아온 나 할머니는 30년 전 용두동 골목에 주꾸미집을 열었다. 때때로 지붕에서 비가 샐 정도로 낡은 건물에서 장사를 시작했지만 그마저도 빌린 공간이라 맘대로 수리도 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나 할머니의 '손맛'은 순식간에 소문이 나 지금은 용두동 골목에 주꾸미 거리가 생겼다. 인기에 장사가 잘되다 중간중간 경기가 안 좋아 살림이 어려워졌을 때도 할머니는 기부를 거르지 않았다고 한다.
구 관계자는 "나 할머니가 워낙 말씀이 없으셔서 겨우 들은 얘기지만 '손님들 덕분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만큼 이제 아들도 다 자랐으니 다시 베풀어야겠다는 마음에서 기부를 하게 됐다'고 하셨다"고 전했다.
유덕열 구청장은 나 할머니의 사연을 접하고 최근 직접 간담회를 열어 공무원들에게 소개하며 감사의 마음을 전하기도 했다.
나 할머니는 올해도 20㎏짜리 쌀 100포대를 아들과 함께 싣고 와 구청 앞에 내려놓았다. 이제는 얼굴이 다 알려진 탓에 겨우 사진도 한 장 찍었다.
나 할머니는 "주꾸미가 나한테 희망이 되었듯이 내가 기부한 쌀이 설 명절을 맞아 어려운 이웃에게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구는 나 할머니가 기탁한 쌀을 다문화가정과 저소득가구 등에 전달할 예정이다.
유 구청장은 "이런 독지가들이 있어 살맛 나는 동대문구를 만들 수 있다"며 구가 실천하고 있는 희망의 일대일 결연사업을 비롯해 나눔 문화를 확산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많이 운영하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