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병대와 한국전쟁

장다비 2007.09.10 01:48 조회 수 : 13983 추천:164

장항.군산.이리지구전투
(‘50.7.15~7.21) 진동리 지구전투
(’50.7.31~8.13) 통영상륙작전
(50.8.17~9.22) 인천상륙작전
(’50.9.15~9.20)  서울탈환작전
(‘50.9.20~9.28) 북진.철수.재 반격작전
(’50.10~‘51.1) 도솔산지구전투
(51.6.2~6.20) 김일성고지(펀치볼)지구전투
(‘51.8.30~9.3) 김포지구전투
(’51.3.7~‘53.7.27) 장단(사천강)지구전투
(’52.3.17~‘53.7.27) 전략도서 확보작전
(’51.2.14~‘53.7.27)

해병대는 창설된 지 불과 1년 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풍전등화의 조국을 구원하는 구국의 선봉군으로 진동리 지구 전투와 통영상륙작전에서 연전연승함으로써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영원한 애칭을 얻어냈으며,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빛나는 영예를 차지하였다.
특히, 북괴군의 발악적인 최후 공격으로 낙동강 전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한국 해병대는 동년 9월 15일 한반도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인천상륙작전에 참가하여 북진의 혈로를 타개하였고, 9월 28일에는 수도 서울 탈환작전을 감행하여 중앙청에 태극기를 계양하는 수훈을 세었다.

동년 10월 7일 북진의 선봉이 되어 원산ㆍ함흥지역에서 분전하던 해병대는 중공군의 개입으로 잠시 철군하였고, 1951년 1ㆍ4후퇴 시 재 반격 작전을 개시하던 중, 동부 전선의 도솔산 지구 전투와  펀치볼(김일성 고지)지구 전투에서 ‘무적해병’의 전통을 수립하면서,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신인이 경탄할 공훈’ 이라는 격찬을 받았다.

한편 해병대는 1951년 2월부터 동ㆍ서해안 전략 도서 확보 작전을 수행하여, 휴전 뒤 서해 5개 도서를 아군의 통제아래 두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2년 3월 중ㆍ동부 전선에서 서부 전선으로 이동한 해병대는  장단(사천강)지구 전투 및 연천지구 전투를 1년 4개월 동안 수행하면서, 중공군의 공격을 완전히 저지하고  휴전을 맞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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