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년 제8회 아시안게임이 열리고 있는 태국 방콕 실내체육관.
약 3만여 관중이 가득 메운 가운데 한국과 중국과의 여자농구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 한국 간판 농구스타 박찬숙선수와 함께 호흡을 맞추며 농구선수답지 않은 작은 키(1m62)로 거장 상대선수들을 제치며 날렵한 몸동작과 함께 정확한 패스를 구사하던 ‘작은거인’ 전경숙(51.가드)선수.
한국팀은 그녀의 눈부신 활약에 힘입어 중국을 77대68로 따돌리며 종합우승을 차지했고, 당시 최고 체육훈장인 ‘백마장’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하사 받은 그녀가 현재 브라질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이젠 코트를 누비고 다니던 예전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50대 중년의 나이의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그녀는 30년 만에 선배언니와 후배들을 만난다는 설렘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며 조심스럽게 자신이 그 동안 겪어왔던 고통과 현재 심경을 고백했다.
덕성여중 3학년 재학시절부터 농구를 시작한 그녀는 대표선수에 이어 한국 실업농구팀에서 맹활약하다 농구선수로는 처음으로 76년 대만 남이 실업농구팀으로 스카우트 되어 언론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그렇게 키 작고 보잘 것 없었던 자신을 일약 스타로 만들어준 농구에 남보다 애착심이 강해 미친듯 코트를 누비고 다녔던 그녀는 지인의 소개로 80년 6월에 은퇴를 선언하고 여자로서의 평범한 주부의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이 사랑했던 농구와 사별하면서 까지 걸었던 제 2의 인생은 험난하기만 했다.
배우자 사진만 보고 먼 남미 파라과이로 시집을 온 그녀는 몇 년동안 남들이 겪는다는 '향수'병(病)에 시달려 매일 눈물로 세월을 지새웠다. 그러기를 몇 후. 결국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그녀는 연일 쉴새 없는 고된 일을 하면서 남몰래 삼켜왔던 설움과 아픔을 떨쳐버리려고 매달렸다.
다행히도 운영하던 양계장 사업은 꾸준한 매출성장으로 인해 사업도 번창했고 남부럽지 않은 재산도 손에 쥐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은행에서 편지가 한 통 날아 들었다. 내용인 즉 대출자가 돈을 갚지 못하고 도산을 해 모든 금액을 보증인이 물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얼마 전 평소 가깝게 지내온 친인의 부탁으로 은행 보증을 섯 던 것이 결국 땀 흘려 일궈온 양계장을 하루아침에 은행에게 고스란히 뺏겨버려야 한다는 참담한 현실이였다.
허무하게도 모든 것을 잃은 그녀는 남편의 제의에 따라 브라질로 재 이민을 결심했다. 아는 분이 지방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데 투자비용도 적고 수입이 괜찮다는 소리에 남은 살림 등을 정리하고 겨우 투자비용을 마련해 무작정 가족들과 함께 지방을 찾은 그녀는 브라질에서의 새로운 인생의 첫 발을 딛었다. 그러나 미리 계획된 사기극에 휘말려 또 한번의 시련을 겪었다.
이렇게 고통과 좌절의 나날이였던 지난 파란만장 했던 삶은 한인들이 많이 밀집되어 있는 봉헤찌로에 입성(?)하면서부터 조금씩 활기를 되찾아갔다. 다행이 남편이 해병대 출신관계로 해병대전우회 회원들의 끈끈한 전우애에 소규모 식품점을 운영할 수 있었고, 지금은 한인이 운영하는 호텔사우나를 파격적인 조건으로 인수받아 조금씩 재기를 꿈꾸고 있다.
그런데 그녀에게 요즘 또 다른 걱정거리가 생겼다. 그것은 오는 9월 브라질에서 열리는 세계 여자농구대회를 출전하기 위해 한국 여자농구 대표팀이 브라질을 방문하기 때문.
자신과 함께 오랜 선수생활을 해 온 박찬숙 선수가 대표감독이 되어 후배들을 데리고 온다는 소식에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지만 지난 휴유증으로 남편은 요도암에 걸려 세 번에 걸친 대수술을 치뤘고 현재까지 통원치료로 인해 고액의 병원비조차도 조달하기가 벅찬 자신의 형편과 처지에 참담함을 느낀 나머지 눈물을 머금고 만남까지도 포기할 생각도 했다.
“지금 사업도 인수 받은지 얼마 안돼서 힘들어요. 한국을 떠나올 때 외국으로 시집을 가는 저를 보고 다들 부러워했어요. 다들 제가 잘 살고 있을 거라고 믿고 있겠지만 지금 제 모습은 그렇지 않네요…잘 되었더라면 모든 지원을 다 해주었을 텐데…” 라며 말끝을 흐리는 그녀. 이런 이유로 선수생활 사진첩은 아예 꺼내보려하지 않았고 아직까지도 모국 땅을 단 한번도 밟아보지 않았던 그녀지만 아직까지 선배나 후배에 대한 사랑은 여전히 따뜻하게 느껴졌다.
불운하게도 단짝이였던 박찬숙선수는 올해 7월 홍콩에서 열린 존스컵국제대회에서 전패를 기록해 대표팀에서 경질되는 바람에 만남은 어렵게 됐지만 새로 부임된 이옥자코치는 큰 선배언니라고. “다행이 많은 한인단체에서 도움을 주신다는 얘기를 듣고 얼마나 기뻣는지 몰라요. 응원단을 만들어 응원도 갈 꺼예요.” 라며 조금씩 웃음을 되찾은 그녀는 한국선수들을 위해 “꼭 좋은 성적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네요.” 라고 선전을 기원하기도 했다.
한편 브라질 해병대전우회(회장:정효근)에서는 대표선수들을 위해 재 브라질 체육회(회장: 김요진)와 함께 교민응원단을 결성하는 한편 만찬을 마련해 이들의 아름다운 만남의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다.
(사진: 파라과이로 떠나기 전 김포공항에서 박찬숙 선수와 함께)